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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 전 연재/율, 할비랑 그림책 읽자!(출간 전 연재)

우리 동네에는 목욕탕이 있다 - 백희나, <장수탕 선녀님>

by 도서출판 상상의힘 2024. 10. 28.

 

우리 동네에는 목욕탕이 있다. - 백희나, <장수탕 선녀님>, 책읽는곰

 

1.

추석이다. 달이 둥글게 가득 차 있다. 낮의 하늘보다 밤하늘은 더욱 신비롭다. 수많은 별들 가운데 달이 있고 또 내가 선 지구가 있다. 달은 어김없이 차고 이울며, 지구의 둘레를 쉼 없이 공전한다. 또 지구는 지구대로 제 스스로 돌고. 누군가 서늘하게 푸른 별이라고 지구를 불렀다 한다. 육안으로 본 적 없지만 사진으로, 상상으로 떠올려보면 그 또한 신비롭다. 우주의 삼라만상이 거대한 오케스트라처럼 저마다 제몫을 다하며 운행하고 있는 것이다. 밤하늘을 보면 과연 누가 빚어낸 세상인지 숙연해지기도 하고, 인간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그리고 또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이 우주를 누가 빚어냈는지는 모르지만 나를 빚어낸 것은 내 어머니와 아버지임은 분명하다.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 역시 당신들의 몫을 내세울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그다지 반짝이지 않는 자손이기에 당신들이 빚어냈음을 굳이 내세우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어머니와 아버지는 나를 외면하지 못하실 것이다. 호적에 딱 박혀 있으니.

추석이면 작고한 두 분이 어김없이 떠오른다. 내가 천애의 고아임도 새삼 자각한다. 이런 날이면 짐짓 함께 보냈던 일상들이 떠오르기도 하는 것이다. 

추석이다. 설날이든 추석이든 이른 새벽이면 엄마는 나를 깨워 목욕탕을 가고는 하셨다. 그 전날까지는 음식 장만 하시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그러나 추석 당일에는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으셨나 보다. 꾀죄죄한 상태 그대로 막둥이를 차례 상 앞으로 내보낼 수가 없으셨나 보다. 아마도 여덟 살, 아홉 살까지는 여탕을 졸래졸래 따라나서지 않았을까 싶다. 그 목욕탕 나들이가 내게는 고역이었다. 숨이 막히는 뜨거운 물속에서 꼼짝없이 몸을 불려야 했으며, 엄마의 손에 장착한 붉은 이태리타올은 또 얼마나 매서웠던지. 때수건이 사정없이 몸을 훑고 지나갈 때마다 후두둑 때가 송충이처럼 떨어졌고, 나는 송충이처럼 이리저리 몸을 배배 뒤틀고는 했다. 눈물이 찔끔 날 만큼 아팠다.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그래도 먼저 나와 구석 자리에 앉아 마시는 우유는 달고 고소했다.

언젠가는 나를 사이에 두고 엄마와 옆 집 아주머니가 말다툼을 하기도 했다.

“다 큰 머스마를 여탕에 델꼬 오면 우짭니꺼, 아지매!” 이건 아주머니의 말.

“알라가 머스마, 가시나가 어딨노. 아무것도 모린데이.” 이건 엄마의 말.

나는 내가 다 큰 머스마인지, 알라인지 알 수가 없었고,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그 말다툼이 켕기셨는지 그 작은 사건이 있은 뒤 엄마를 따라 더 이상 목욕탕을 가지는 않았다. 그 무시무시한 붉은 이태리수건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얼마 전 동시 한 편을 읽고 내가 떠올린 것도 아주 오래 전 그 시절, 그 마음이었다.

 

몸은 하나야

 

목욕탕에서 엄마가 언니 등을 밀어 준다

분명 등만 밀어 준다고 했는데

목 팔 손끝까지 밀고 있다

아 엄마~ 등만 민다며

분명 등만 밀어 준다고 했는데

엉덩이 허벅지

종아리까지 밀고 있다

아~ 엄마아~

분명 등만 밀어 준다고 했는데

겨드랑이 옆구리

아예 몸을 틀어서 가슴 배까지

싹싹 밀고 있다

아~~ 엄마아~~

언니도 싹싹 빌고 있다

<포도, <블랙> 제76호, 2024.5.12.>

 

이 동시를 읽는 순간, 나는 단박에 알아차렸다. 좋은 동시인이 탄생했음을. 이 시에는 세 사람이 등장한다. 엄마와 언니,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는, 곧 닥쳐올 어두운 미래가 두렵기 짝이 없는 나. 그런데 시에서 목소리를 내는 이는 언니뿐이다. ‘아~ 엄마아~’라고 처음에는 왜 약속을 안 지키느냐는 저항, 두 번째는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는 비난, 세 번째는 제발 살살, 살살이라고 사정하는 당부가 담겨 있다. 그 저항과 비난과 당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엄마는 온몸 구석구석을 ‘싹싹 밀고’, 언니는 그에 짝을 이룬 채 ‘싹싹 빌고’ 있다. 사실 이 시에서 말하는 사람은 또 있다. 엄마다. 엄마의 말은 제목에 있다. ‘몸은 하나야!’라는 엄청나게 단단한 선언. 사실이기도 하고.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언니도, 동생도.

 

2.

엄마의 손에 이끌려 가던 목욕탕, 그저 평범하게 동네마다 하나씩 자리 잡고 있던 목욕탕. 그평범한 곳에서 벌어지고 있던 참혹한 일은 그림책 작가들에게도 잊지 못할 경험이었나 보다. 그림책 작가 손지희는 이 목욕탕의 실체를 남김없이 증언하고 있다. <지옥탕>. 제목이 선정적이기는 하나, 그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전말이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다. “탈의실에서 우리 반 철수를 봤다. 창피해!”로 시작하여 과제로 던져진 엄마의 넓디넓은 등판을 거쳐 마침내 획득하는 바나나 우유까지.

그래도 목욕탕을 담은 그림책의 압권은 <장수탕 선녀님>이다. 손지희의 그림책이 일종의 보고서로 읽히는 반면, 백희나의 그림책은 옛이야기의 모티브도 끌어오고, 판타지 장치도 활용하여 아주 단단한 서사를 구축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장수탕 선녀님>에서 압도적인 성취는 제목에서 피력된 캐릭터, ‘장수탕 선녀님’이다.

백희나의 그림책은 전통적인 회화의 틀을 넘어선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떠올리게 한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무엇보다 배경을 실사와도 같이 정교하게 재현한다. 그 정교한 배경은 작품의 현실성을 강화하고, 캐릭터의 감정 표현에 실감을 더한다. 백희나의 그림책에서 배경은 대체로 실제 사진이다. <구름빵>이 실제의 배경을 활용한 사진에 하드보드지로 오려내 인격화된  고양이 가족의 캐릭터를 연출하고, 다시 전체를 촬영하여 만들어낸 그림책이다.

<장수탕 선녀님>에서 캐릭터는 하드보드지로 오려낸 것이 아니라 닥종이로 물에 녹이고, 이기고, 형체를 빚어내고, 채색을 한 인형이다. 장면마다 인물의 표정이나 동작이 다르기에 각기 서로 다른 인형을 만들어야 했음은 물론이다. 표지 전면에 등장하는 선녀님을 보라. 얼핏 보면 그로테스크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요모조모 우리네 할머니들과 전혀 다를 바 없어 친숙하기도 하다. 백희나가 얼마나 인물의 창조에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심지어 할머니가 흐뭇하게 빨고 있는 요구르트도 실제의 요구르트가 아닌 이 그림책만을 위해 특별 제작한 요구르트임을 알 수 있다. 원래의 요구르트와 용기의 크기 비율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플라스틱 요구르트마저 닥종이로 재현되는 영광을 누린 것이다. 나였더라면 기왕의 요구르트 용기에 닥종이를 살짝 덧씌우면 조금 도톰하기는 하겠지만 실감도 더할 것이고 종이 비용도 줄일 수 있었을 텐데, 백희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것만 봐도 쉬운 길을 죽자고 마다하는 성격임을 알 수 있다. 원래 예술가란 그래야 하는 법이다.

그림책을 펼치면 속표지에 네모난 목욕탕의 굴뚝이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본 시선으로 포착된다. 이런 시선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조감도와 달리 기어 다니는 벌레의 시선이라 해서 벌레 충을 써서 충감도 혹은 우러러본다는 의미를 담아 앙시도라고 칭한다는 것은 쓸데없는 아는 척이다. 목욕탕은 페인트로 써 내려 간 글씨는 낡을 대로 낡아 지워져가는 중이다. 예사 목욕탕이 아니라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목욕탕인 것이다. 제목이나 작가의 이름은 표지와 마찬가지로 가로가 아니라 세로로 씌여져 있다. 굴뚝에 쓰여 있는 세로 글씨 ‘목욕탕’과 짝을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 옛 문헌의 글자 배열을 본뜬 것이다. 세로로 써내려 가는. 옛이야기를 모티브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을 펼치면 ‘목욕합니다’라고 알리는 입간판이 있고, 해가 미처 떠오르기도 전의 어둑한 새벽 기운이 푸르다. 왜? 사실 그림책을 비롯한 모든 텍스트를 읽거나 볼 때에는 항상 질문해야 한다. 왜? 가능한 한 작가의 의도를 짐작해 보기 위해서다. 맞거나 맞지 않거나 관계없다. 우린 전문가가 아니라 독자니까. 그래도 작가의 생각을 추체험해 보는 것은 읽기를 한결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 왜 새벽일까? 아마도 다른 손님들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이 그림책에서 주요한 인물인 덕지와 선녀님, 엄마 이외의 사람은 단 두 사람이 등장한다. 입구에 돈 받는 주인 할아버지. 또 한 사람은? 선녀님이 요구르트를 먹는 누군가를 가리키며 수줍게 물을 때, 그 누군가. 여타의 인물이 끼어들면 초점이 흩어질 뿐만 아니라, 일일이 제작하는 수고로움도 만만치 않을 것이기에.

덕지는 장수탕이 싫다. 놀거리가 많은 스파랜드에 가고 싶다. 그런데도 엄마는 오늘도 장수탕이다. 왜? 아마도 여의치 않은 살림살이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덕지도 좋은 점이 없지 않다. 요구르트와 마음껏 물장난을 칠 수 있는 냉탕이 있기 때문이다. 이 날도 덕지는 엄마의 염려에도 아랑곳없이 냉탕에서 마음껏 논다. 그러다 ‘이상한 할머니’를 덜컥 만난다. 판타지가 시작된다. 

판타지는 자세히 살펴보면 세 종류가 있다. 옛이야기 같은 판타지는 현실과 판타지가 뒤죽박죽 섞여 있다. 길을 가는데 갑자기 도깨비가 나타나는 식이다. 예고도 없이 호랑이가 나타나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고 으르기도 한다. 이런 판타지는 이야기의 전개 자체가 중요하다. 어떤 일이든 가능하기 때문에 그 효과를 톡톡히 보아야만 한다. 또 다른 유형은 처음부터 끝까지 현실은 없고 판타지만 있는 이야기다. <반지 제왕> 같은 작품이다. 이 작품의 배경은 현실적인 인간의 세계와 초월적인 신들의 세계, 그 사이인 중간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런 작품들은 각각의 요소들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파헤쳐 보아야 한다. 예컨대 호비트는 순수한 어린이를 상징하고, 골룸은 인간의 추악한 욕망을 상징한다는 식이다. 세 번째 유형은 <해리 포터>처럼 현실과 판타지가 엄격하게 분리된 세계이다. 마법사들은 현실 세계의 머글들 속에서 마법사가 아닌 척 살고 있다. 이런 유형의 판타지를 근대적인 판타지라고도 한다. 근대에 들어 합리성이 중시되고, 이때부터 가능하면 난데없이 도깨비가 등장하는 것을 피하게 된다. 그리고 피할 수 없다면 최소한의 장치만이라도 마련하고자 한다. 그래서 이런 작품들에는 문이 있다. 현실 세계와 판타지 세계를 나누는 혹은 연결하는 문이다. <해리 포터>에서는 런던의 킹스크로스 역 9와 3/4 승강장이다.

그런데 사실 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문 앞에 선 인물의 머뭇거림, 망설임이다. 현실 세계의 눈으로 보면 9와 3/4 승강장은 그저 벽일 따름이다. 해리 포터는 그 벽 앞에서 망설인다. 과연 이 벽을 통과해 기차를 탈 수 있을까 하고. 

<장수탕 선녀님>은 그러니 옛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여기의 이야기인 근대적인 판타지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 셈이다. 덕지는 냉탕이란 문 앞에서 머뭇거리고 망설인다. 이상한 할머니라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선녀님은 나름 현실성을 부여하고자 ‘선녀와 나무꾼’을 끌어온다. 덕지는 ‘다 아는 이야기였지만 모르는 척 끝까지 들어 드’린다. 이상하다고 느끼지만 판타지를 승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번 승인한 다음의 판타지는 더 이상 거칠 것이 없다. 장수탕 선녀님은 ‘수줍게’ 요구르트를 청하기도 하고, 감기에 걸려 앓고 있는 덕지에게로 물이 담긴 대야 속에서 불쑥 나타나 고마운 마음을 치유의 능력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것이 어린이의 세계이며, 이야기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림책, 그 가운데 이야기 그림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히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글과 그림이 함께 건네는 이야기다. 이 당연한 본질을 가장 잘 살리는 그림책 작가 중의 한 사람이 백희나다. 이야기의 힘과 아름다움. 이는 우리 그림책 작가에게 부족한 부분이기도 하다. 당연하게도 백희나의 모든 작품이 솔기 없이 매끄럽게 글과 그림이 조화를 이루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이가 쓴 많은 그림책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이 본질에 부합하는 작품이 <장수탕 선녀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지만 사실 내가 어찌 생각하는지가 백희나 작가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 율이에겐 상관이 있다. 왜? 내가 한번이라도 더 읽어줄 것이기에.

 

3.

‘자, 이리 소파로 올라 와. 오늘은 목욕탕 이야기야. 율이는 목욕탕 가 본 적 있어? 있다고?

언제? 누구랑?

엄마랑? 아, 호텔에 딸려 있는 목욕탕?

어땠어? 재밌었다고? 물장난이?

자, 이 책에도 아이가 나와. 목욕탕 가는 길이야. 엄마랑.’

율이는 뒷모습을 보이고 걸어가는 덕지를 ‘나야’라고 지칭했다. 그래서 그 다음 장면부터 덕지는 율이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림책을 읽어나가는 어느 순간 율이는 그림책의 주인공이 자신이 아니라고 했다. ‘나, 아니야!’라고. “그래도 한 가지!”라고 마음속으로 남 몰래 훔쳐보는 장면의 덕지가 등장하는 앞 장면이었다. 닥종이 인형으로 표현된 아이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나보다. 할 수 없이 덕지는 다시 제 이름을 되찾았다.

읽어 가는 동안 별 다른 반응은 없었다.

그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선녀 할머니가 등장했다. 

‘율이는 옛날 이야기 좋아하지? 나뭇꾼과 선녀도 알아? 몰라? 그럼 나중에 그 얘기도 해 줄게.’

‘율이도 감기 걸린 적 있지? 덕지는 왜 감기 걸렸어? 물놀이를 많이 해서? 그래, 물놀이는 조금만 해. 엄마가 이제 그만 하면, 네 하고 그만 하는 거다.’

사실 그림책을 읽는 동안 기회다 생각하며, 이처럼 아이의 생활 방식을 교정하려 드는 것은 최악의 책 읽기다. 책 읽어주기의 즐거움을 반감시키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그 유혹을 떨쳐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물놀이는 정말 아이들이 좋아하는 놀이다. 어떤 것이든. 할비 집에 올 때마다 요즘은 베란다 화분에 물주는 것도 으레 하는 놀이로 안착했다. 화분마다 식물들에게 인사하고 조리개로 물을 준다. 놀이가 끝나면 당연 베란다는 물바다가 된다. 이제 그만 하면, 네 하고 제발 그만 했으면 싶은 것이다. 할비의 마음은.

다시 선녀님이 덕지를 찾아오고, 다음 날 거뜬하게 나은 덕지가 할머니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뒷면지에는 혼자 있는 선녀님이 등장하고, 탈의실에 놓인 냉장고에는 요구르트가 몇 개 줄에서 비어 있다. 옷을 도둑맞은 선녀님은 요구르트 훔쳐 먹는 맛을 안 것이다. 

뜻밖에 율이는 선녀님처럼 요구르트를 마시면서 혼잣말로 ‘재밌다’라는 한 마디로 <장수탕 선녀님>을 평가했다. 이어서 요시타케 신스케의 <뭐든 될 수 있어>와 <오줌이 찔끔>을 읽고 난 뒤 그림책 세 권을 나란히 놓고 물었다. 난 하려는 질문이 얼마나 유치한지 알고 있다. ‘어떤 책이 제일 재미 있었어?’ 그런데 늘 할비보다 할미가 더 좋다고 똑 부러지게 대답하는 아이의 선택은 의외로 ‘다 재미있어’였다. <장수탕 선녀님>은 그림책의 미적 자질만이 아니라 재미에서도 요시타케 신스케의 작품에 뒤지지 않은 것이다. 나는 무엇이 그리 재미있었는지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다시 읽어줄 시간이 벌써 기다려진다. 다음 주말에나 볼 텐데......

다음 주말.

‘율! 우리 이 책 읽자.’ ‘안 읽을 거야.’ ‘왜?’ ‘꿈에 나왔어. 무서워.’ ‘어떤 꿈이었는데?’

어떤 꿈인지 들을 수는 없었다. 표지의 선녀할머니가 아무래도 이 40개월의 아이에겐 무서웠나보다. 에휴, 조금 더 커야 이 그림책의 진수를 맛볼 수 있겠지 싶다.  

 

4.

백희나는 2020년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기념상을 수상했다. 평생을 아동문학에 헌신해 온 작가에게 주는 상이었다. 아동문학계가 환호했다. 그런데 신문 기사는 일제히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을 한국의 백희나가 받았다고 도배를 했다. 나는 조금 언짢았다. 세상 사람들이 알기 쉽게 설명하려고 이렇게 타이틀을 단 것이겠지만, 어디까지나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은 그냥 린드그렌이었다. 노벨에 견줄 사람이 아니었다. 어찌 다이나마이트를 만들어 번 돈으로 만든 상과 평생을 아름다운 문학작품을 쓴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이름을 기념하여 만든 상이 같을 수 있을까? 린드그렌 기념상은 <삐삐 롱 스타킹>, <로테와 루이제>, <사자왕 형제의 모험>, <산적의 딸 로냐> 등등 수많은 어린이문학 작품을 남긴 그이를 기념하기 위해 스웨덴 국가가 제정한 상이다. 물론 상금도 엄청나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하니 밝히자면 5백만 크로나다. 지금껏 상을 받은 작가들도 마땅히 받을 사람들이 받았다. 그림책 작가로는 모리스 샌닥, 숀 탠, 이솔, 에바 린드스트룀 등이 받았다. 동화 작가들은 또 어떤가?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 필립 풀맨, 캐서린 패터슨, 재클린 우드슨 등이 받았다. 그 반열에 나란히 백희나가 선 것이다. 정말 기뻐할 일이다. 그 자체로 기뻐할 일. 노벨상과 비견해서 그만큼 큰 상을 받아서 기쁘다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아동문학 작가 린드그렌을 기념하는 상을 우리네 작가가 받았다는 사실이 기쁜 것이다.

심사평에는 작품의 특성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었다. 백희나 작가의 작품들이 ‘외로움과 연대’에 대한 이야기이며, ‘경이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이며, 그 통로는 ‘감각적이고, 아찔하면서도 날카롭다’고 평가했다. <장수탕 선녀님>이 그렇다. 오랜 세월 홀로 남겨진 채 낡아빠진 목욕탕에서 지냈을 선녀님은 외롭다. 고립된 존재다. 잃어버린 옷을 찾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나라로 갈 수 없다. 그러나 선녀님은 덕지와 관계를 맺는다. 연대한다. 함께 놀며, 요구르트와 감기를 물리치는 힘을 서로 나눈다. 그리고 <장수탕 선녀님>의 세계에는 문이 있다. 그 문을 들어서면 놀랍고도 경이로운 세계와 마주친다. 그 세계와 마주친 어린이는 더 풍요롭게, 더 즐겁게, 혼자가 아니라 함께 논다. 

심사평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백희나의) 모든 이야기에는 아이의 관점과 우리 삶에서 놀이와 상상이 갖는 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담겨 있다.” 멋지다. 심사평의 이 문장은 앞으로 창작될 백희나의 작품만이 아니라, 모든 우리의 그림책이, 모든 우리의 아동문학 작품이 담아야 할 믿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