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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 전 연재/동시 에세이

1.1 시가 내게로 왔다

by 도서출판 상상의힘 2024. 9. 30.

동시 에세이

 

1.왜 동시를 읽어야 하는가?

1.1 시가 내게로 왔다

2.동시란 무엇인가?

3.동시를 읽는 즐거움

4.교실에서 동시 읽기

*          *          *          *          *

 

시가 내게로 왔다.

 

1.

예전 꼬꼬마일 적 어딜 가나 시가 있었다. 이발소에 가도, 목욕탕에 가도, 중국집을 가도 이 시가 있었다. 물론 이발소도, 목욕탕도, 중국집도 연례행사처럼 간 것이 전부였지만. 그래도 커다란 액자에 있는 시는 잊을 만하면 다시 나타나 내게 말을 걸어왔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머지않아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언제나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프고 괴로운 것

 

그리고 모든 것이 순식간이고,

지나간 것은 그리워지느니

 

푸쉬킨, <>

 

참고 견디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오리라는 것이었다. 시의 구석구석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 말이 힘겨운 현실을 넘어서는 데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음은 물론이다. 그래도 작은 희망의 씨앗이 마음의 밭에 떨구어진 것만은 분명했다. 그때 이후로 희망을 온전히 버린 적은 없었으니.

무릇 시란 이런 것이 아닐까. 마음의 밭에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2.

중고등학교 시절 단칸 셋방에서 살았다. 삼형제와 부모님. 큰 누나는 이미 출가인지 가출인지를 감행하고 난 다음이었다. 출가도 가출도 할 수 없었던 다섯 식구가 옹기종기 부대끼며 지냈다. 그나마 숨통을 틔운 것은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리는 다락방이었다. 그곳에서 형들 둘은 지냈고, 내게는 출입이 금지된 구역이었다. 그러던 차에 큰 형이 군대를 갔고, 나도 비로소 수컷들의 영역에 편입될 수 있었다.

그 다락방에서 내가 즐겨했던 은밀한 짓은 형들의 책을 훔쳐보는 일이었다. 주로 문고판 소설들을 읽었다. ‘동서문고정음사에서 나온. <테스>, <아버지와 아들>, <인간의 굴레>, <수레바퀴 밑에서> 등의 소설을 야금야금 읽었다. 다락방에서 숨어 지내는 생쥐가 아무도 몰래 뒤주에 구멍을 내고 곡식을 훔쳐 먹듯이.

그러나 그보다 더 맛난 것은 형들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것이었다. 특히 세 살 터울 작은 형, 이제 고등학생 시절을 지나고 있었던 형의 일기장은 가히 훔쳐보기가 주는 모든 미덕을 모조리 갖춘 압권이었다. 연애이야기도, 집안에 대한 푸념도, 공부 이야기도 모두 심장을 쫄깃거리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그 일기장 속에 시가 있었다. 지금도 더러 시를 쓰기도 하는 작은 형의 초기 시였다. 제목이 <울보와 천사>라는 연작시. 그게 시라는 것도, 연작시라는 것도, <목마와 숙녀>와 비슷한 풍의 연애시라는 것도 처음 알았지만, 난 몰래 형의 시들을 베껴 적기까지 했었다. 4, 50편이나 되었으니. 비슷비슷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계속 달리 표현하고 있는 시들을 훔쳐보며, ‘음 이런 게 시군!’ 조금씩 알 듯 모를 듯 했을 터이다. 주로 내용은 나중에 안 것이지만, 청마 유치환의 다음 시와 그다지 다를 바가 없었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님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유치환, <그리움>

 

그럼에도 시를, 문학을 좋아하게 된 계기를 들라 하면, 내 마음은 어느새 다락방에서 숨 죽여 일기장을 훔쳐 읽던 까까머리 중학생 때로 달려간다.

 

3.

그에 비할 때 고등학교 시절, 시와의 만남은 한결 더 시의 본질에 가까운 해후였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나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일종의 배달 플랫폼 사업이었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었기에 가능했던, 부산에서만 있었던 플랫폼이기는 했지만.

당시 부산은 우리나라 최고의 항만 물류의 거점 도시였다. 들어오고 나가는 물품들을 보관하는 보세창고들이 즐비했으며, 각각 창고회사의 직원들은 하루하루 변하는 물동량을 보험회사에 신고해야만 했다. 나의 아르바이트는 그것을 대행하는 일이었다. 창고회사들이 저마다 직원들이 직접 보험회사에 제출해야 하는 서류를 일괄 수거하여 대신 제출하는 식이었다. 열대여섯 곳 남짓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저마다 회사의 관점에서는 아주 작은 비용이었지만, 그것이 모이면 고등학생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큰돈이었다.

나는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의 허락 아래 보충수업, 자율학습도 듣지 않고 지체 없이 학교를 나섰다. 그리고 타박타박 걸어 창고회사를 쭉 방문했다. 아마 1시간, 1시간 반 남짓 걸리는 거리였다. 그 길을 매일 걸으면서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친구들은 모두 입시에 여념이 없었다. 나는 뭐라도 해야 했다. 공부 비슷한 것이라도. 처음에는 팝송 가사를 외웠다. <Bridge over Troubled Water>, <Yesterday>, <Puff, the Magic Dragon>, <Hey Jude> . 그렇게 그나마 아는 노래의 대부분을 왼 다음, 그 다음은?

시를 외웠다. 윤동주의 시들. <서시>, <소년>, <별 헤는 밤>, <참회록> .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라는 구절이 특히 좋았다. 한번도 누군지 찾아보지 않은 프랑시스 잠도, ‘주여 때가 왔습니다밖에 모르던 라이너 마리아 릴케도 시인하면 떠오르는 이름이 되었다. 사실 이 이름들이 무에 중요하랴. 그저 작고 여리고 순한 것에 대한 연민, 잊혀져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 부드럽게 궁굴린 모국어의 자모음이 불러일으키는 아스라한 동경이 청소년기의 마음을 채워 주었다.

<새로운 길>도 외고 또 외웠다. 나의 길, 내가 가야 할 길을 생각하며.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윤동주, <새로운 길>

 

물론 지금껏 제대로 기억하는 시들은 없다. 그래도 그 긴 시간을 나는 매일 시를 놓지 않고 지냈다. 청소년 시절, 그때부터 시는, 문학은 내 곁에 함께 있었다. 내가 의식하든 하지 않든.

 

4.

고등학교 적 배웠던 국어 교과서에는 안톤 슈낙Anton Schnack<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란 수필이 실려 있었다. 그 첫 대목은 울음 우는 아이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의 한 모퉁이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사체 위에 초추의 양광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우는 아이들이라고 하지 않고, ‘울음 우는 아이들이라고 했을까 의아하기도 했고, ‘사체’, ‘초추’, ‘양광등 어렵고 낯선 한자어가 곳곳에 흩어져 있어 명료하게 이해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렇지만 이 글을 가만가만 읊조릴 때에는 생의 끝 모를 쓸쓸함이 곧 터져 나올 울음처럼 몸 안에 가득 차오르고는 했다.

아마 그 시절부터였을 것이다. 시인이 되고 싶었던 것은. 그 이후로 줄곧 시의 곁에서 뭉그적거리며 시가 말을 붙여주기를 기다렸으나, 시는 나 같은 어중이떠중이에게는 곁을 주지 않았다. 결국 그저 문학의 주변에서 서성거리는 말 많은 평론가가 되었을 뿐이다. 더러 제자들에게는 시인이 되려고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를 열심히 쓰다 보면 시인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닐까 했지만 속으로는 정작 시인이 되고 싶어 안달을 떨지 않았을까 싶다. 차고 넘치는 것을 모아 시집을 내는 것이라고 했지만 흙이고 모래고 할 것 없이 샘의 바닥까지 박박 긁어 시집을 내기까지 했으니 비웃음을 사기에는 어딜 내놓아도 부족함이 없지 않나 싶다.

그럼에도 시의 곁에서 머무르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어느 시인은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었다라고 말하지만 나는 문학이 나를 키웠다고 생각한다. 물론 문학만은 아닐 것이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유전자도, 먹었던 음식도 내 몸을 살찌웠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저러한 경험도 나를 성장케 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가장 큰 영향을 나의 내면에 아로새긴 것은 단연코 나는 문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 어찌 문학이 힘이 세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으랴.

문학은 힘이 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