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왜 동시를 읽어야 하는가?
1.1 시가 내게로 왔다
2.동시란 무엇인가?
3.동시를 읽는 즐거움 - 작품과 작가
3.1 비평적 에세이 쓰기의 실제 – 방주현의 『내가 왔다』를 통해
4.교실에서 동시 읽기
* * * * *
비평적 에세이 쓰기의 과정 – 방주현의 『내가 왔다』를 통해
동언
1. 먼저 동시집을 읽는다
동시집을 읽는다. 누구의 시집? 누군들 어떠랴? 그럼에도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니 먼저 아는 이의 시집을 선택한다. 굳이 대면을 하고 인사를 나눈 이만이 ‘안’은 아니다. 내 ‘안’에 있기만 하다면 ‘아는’ 이다. 그래도 '안' 있는 아는 이의 새로운 시집이면 더 좋을 것이다. 낡은 것도 좋지만 새것에는 새것의 내음이 난다. 어린 날 문 앞에 떨어진 신문에서 나던 아주 새로운 냄새처럼. 엄마는 이 냄새가 좋다고 하면 뱃속에 회충이 있어서 그렇다고 했다. 회충이 휘발유 냄새를 좋아해서 어서 달라고 요동을 치는 것이라고. 그래서 나는 회충이 나와 취향이 같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신기하기도 했다. 여하튼 아는 이의 새로운 시집. 그게 나의 취향이든 내 안의 회충이 요동을 치는 것이든. 아는 이의 새로운 시집은 나를 설레게 만든다. 설렘이 없는 읽기는 얼마나 밋밋한가? 아는 시, 아는 시인을 향한 설렘이 있다면 시를 읽을 준비는 모두 갖춘 셈이다.
나는 방주현의 『내가 왔다』(문학동네, 2020)를 집어 든다. 이 시인은 동시 전문 잡지 『동시 마중』의 첫 번째 동시문학상을 받은 시인이다. 잡지에서 시를 읽는 순간 나는 알았다. 좋은 시인을 또 한 사람 알게 되었구나 하고. 그때부터 그이는 내 ‘안’, 내가 아는 시인이 되었다.
주전자
바다를 나가
고기를 한가득 싣고 올
꿈을 꾸던 쇠는
주전자가 되어
보리차를 끓일 때마다
항구에 돌아오는
배가 된다
내가― 왔다―
뿌― 뿌―
뿌― 뿌―
시는 긴 한 문장으로 하나의 연을 이루고 있다. 그 한 문장 속에 과거와 현재, 꿈과 현실이 대치된다. 그러나 문장이 채 끝을 맺기도 전에 ‘보리차’를 매개로 날카로운 대립은 하나로 결합된다. 그 결합의 동력은 소리다. 찻주전자가 끓으며 내는 삐삐, 삐삐하는 소리. 비록 배는 되지 못하였지만, 조금은 우습고 조금은 슬프게도 주전자가 되고 말았지만, 그래도 쇠는 운명의 테두리 안에서 출렁이는 꿈을 시연해 보인다. ‘내가― 왔다―// 뿌― 뿌―/ 뿌― 뿌―’
사실 시는 서투르다. 첫 문장은 설명적이며, 너무나 많은 정보를 우겨넣고 있다. 그리고 시적 화자 역시 모호하다. 주전자는 ‘주전자는’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왔다―’는 주전자의 말이다. 너그럽게 보아 시적 화자는 주전자를 대견하게 지켜보는 이일 수 있다. 심정이든 행태든 시적 화자는 묘사를 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럼에도 명징하지 못하다는 평가는 비껴가기 어렵다. 그럼에도 그 서투름은 묘한 긴장을 유발한다. 설계도에 따라 자로 잰듯 작고 단단한 한 편의 시를 축조한 것이라기보다 설명과 묘사의 자유분방한 결합이 빚어내는 자연스러움이 이 동시에는 있다. 후반부의 당찬 선언만으로도 시는 동시의 본질 한 자락을 움켜쥐고 있다. 방주현의 첫 번째 동시집 제목이 『내가 왔다』인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다.
2. 따로 또 같이 읽는다
새로 출간된 동시집을 읽는다. 책을 주문하고, 기다리고, 택배 상자를 거칠게 풀어헤치고, 마침내 작고 노란 표지의 시집을 손에 쥔다. 냉큼 휘리릭 읽지는 않는다. 조금 쓰다듬으며 인사를 나누고, 일단 책상 한 켠에 모셔둔다. 그리고 하루 일과가 끝나고 미뤄둔 설거지까지 마친 다음 드디어 아무 데고 드러누워 시집을 읽는다.
한 작품, 한 작품 읽으며 인상적인 작품에는 오른쪽 귀퉁이를 접어둔다. 접고 다음 쪽을 펼쳤는데 또 마음에 드는 동시가 나타나면 이번에는 왼쪽 아래 귀퉁이를 접는다. 모두 읽고 『내가 왔다』의 접은 곳을 헤아려 보니 15군데다. 우와. 한 곳도 접지 못한 채 슬그머니 손에서 놓는 동시집도 많은 데 이 시집은 15군데나 있다니. 49편의 동시 가운데 15편. 그럼 일단 이 동시집은 합격이다. 물론 당연히 응분의 상도 없고, 그저 내 마음에 합격일 뿐이다. 동시는 특히나 아주 미묘하고 섬세한, 살아있는 짐승이나 꽃나무와 같아서 함부로 재단하기 어렵다. 평가를 할지라도 그건 그냥 내 느낌일 따름이다. 옳고 그르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좋다, 안 좋다는 평가조차 전적으로 주관적일 따름이다. 작품에 대한 평가는 내가 읽은 것일 뿐 작품이 어떠하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고사리 나물을 누구는 좋아하고, 누구는 싫어하듯. 고사리 나물 자체가 좋은 음식인 것은 분명하지만, 고사리 나물이 싫다고 해서 미각이 엉망이라고 말할 수 없고, 고사리 나물이 좋다고 해서 미식가라고 말할 수도 없다. 한 편의 동시는 고사리 나물처럼 존재하고, 그걸 읽는 사람에 따라 평가는 달라진다. 더욱이 읽는 이의 상태나 읽는 상황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예전에는 이걸 무슨 맛으로 먹나 했지만 나이 드니 그 슴슴한 맛이 그렇게나 맛날 수가 없다. 그리고 따로 먹을 때보다 비빔밥으로 다른 나물과 함께 먹으면 그 구수함이 한층 혀에 감기기도 하지 않던가?
‘함께 먹으면’이라고 말하니 동시집을 함께 읽는 것이 떠오른다. 함께 읽기, 동시집 함께 읽기는 정말 권하고 싶은 일이다. 읽는 이에 따라 다채로운 평가가 오가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해석에 마주쳐 시를 새롭게 만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 동안 친구로 지냈는데 갑자기 사랑스럽기 시작한 것처럼. 혼자 가만히 읽기보다 알든 모르든, 맞든 틀리든 마구 수다를 떨며 두어 시간 동시집을 함께 읽다보면 동시집의 온전한 면모에 한층 가깝게 다가설 수 있다. 진짜 그 사람을 알게 되는 것이다. 혼자 만날 때보다 여럿 속에 있을 때의 그가 한층 더 매혹적이며, 그의 본질에 가깝듯. 물론 마친 후 함께 나누는 치맥의 근사함도 함께 읽기를 더 한층 소중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3.꼼꼼하게 다시 읽는다
홀로 남은 나는 선택한 작품을 꼼꼼하게 다시 들여다본다. 함께 읽으며 어떤 시는 빠지기도 하고, 또 새로운 시가 포함되기도 한다. 그러니 이제 꼭 15편은 아니다.
작품을 다시 보며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잡아내는 것이 그 다음 할 일이다. 시집 전체에서 찾기는 쉽지 않으나 가려 뽑은 몇 편 작품들 가운데에서는 조금 쉬운 작업이다. 그렇게 해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들 중 한 편은 「학부모 공개 수업」이다.
학부모 공개 수업
장미 다발을 들고 비닐하우스에서 나오던 팜티마이 아줌마
수학 문제를 설명하던 6학년 2반 이서연 선생님
서류 가방 들고 걸어가던 김유성 아저씨
마을버스를 운전하던 박미양 기사님
모두들 일하다 잠시 멈춰 서서
먼 데 하늘을 보는
11시 무렵
시에는 네 사람의 고만고만한 우리네 이웃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 11시 무렵에는 하던 일을 멈추고 ‘먼 데 하늘’을 본다. 왜? ‘학부모 공개 수업’ 때문이다. 이들은 저마다 생업을 미룰 수 없어 공개된 수업임에도 가서 볼 수가 없다. 그저 ‘우리 아이는 잘 하고 있을까?’, ‘내가 못 가 봐서 풀이 죽어 있음 어쩌지?’, ‘자식 새끼 수업에도 못 가다니, 이놈의 일이 뭔지.’ 등등 등장한 인물들은 저마다 근심과 염려, 안타까움과 자책 속에서 학교가 있는 방향으로 하늘을 본다. 그러나 시 속에서는 인물의 마음이 말갛게 지워지고 없다. 그저 객관적인 기술만이 자리 잡고 있을 뿐.
어떤 시의 특징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시 작품을 더 넓은 공간 속에 부려놓을 필요가 있다. 일반화해야 한다. 네 사람의 등장인물이 갖는 공통점을 구성해야 한다. 이주노동자, 교사, 회사원, 버스운전기사 등의 개별성을 아우르는 공통점. 네 인물을 하나로 규정한다면? 당연히 학부모 공개 수업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 하루조차 짬을 내서 연가를 쓸 수 없는 사람들이다. 우리네 이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생업에 힘쓰는 모든 우리네 이웃이 공개수업에 가지 못 한다고 해서, 11시 무렵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지는 않을 것이기에. 이들은 특히나 자식을 사랑하고, 마음결이 고운 사람들이다. 삶에서 소중한 것이 일터에서 일을 하는 것만큼 그저 그런 내 아이가 그저 그런 교실에서 그저 그렇게 연필을 꾹꾹 눌러쓰며 공부하는 모습을 지켜봐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삶의 진정성을 아는. 그렇지만 그 진정성조차 마음껏 드러내질 못하는 사람들이다. 시는 그 인물들의 마음결을 행의 길이를 깔떼기처럼 좁혀 나감으로써 한데 모으고 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시의 특징을 넘어 시인의 특징을 엿볼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한 편의 시만으로 그의 특성을 짐작해 내기는 어렵다. 그러나 경계는 둘러칠 수 있으며, 또 다른 시편들을 통해 수정될 수도 있기에 추정은 언제나 가능하다. 먼저 눈에 띄는 점은 인물들의 특징이다. 시인은 평범한 우리의 이웃을 시적 대상으로 포착한다. 그리고 이들은 삶의 진정성에 가까이 다가선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조금은 힘겹게 생업을 밀어가는 사람들이다. 그런 점에서 이 동시에는 우리네 현실이 포착되어 있다. 행복한 면모라기보다 조금은 쓸쓸하고 안타까운 현실. 방주현의 동시에는 현실이 존재한다.
더욱이 등장하는 이들은 아이들이 아니다. 동시가 아이들의 삶을 다루는 것인데 반해 이 시인은 아이들의 삶을 어른들의 삶을 통해 들여다보고 싶어 한다. 아니 아이의 삶이, 어른의 삶이 다르고, 따로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저 삶이 있을 뿐이며, 아이 역시 그 삶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로 자리매김될 따름이다. 굳이 아이의 삶과 어른의 삶을 구분하려 들지 않는 것, 아이와 어른의 경계를 허무는 것. 이는 우리 동시의 경계를, 통념을 허무는 것이기도 하다. 무릇 시는 새로움이 요체이기에 이것만으로도 그의 시는 논의에 값한다.
또 다른 시인의 특징은 감정이 개입할 여지를 철저히 차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물을 나열하고, 인물들의 공통된 행위만을 기술할 뿐 시적 화자의 정서적 개입이 전혀 없다. 물론 객관적 기술에 치중할 것인지 느낌의 언어에 치중할 것인지는 개별적인 시편들마다 달리 선택될 것이다. 이 시가 그렇고, 이 시로 미루어볼 때 그의 시집이 그럴 개연성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시는 기본적으로 정서를 촉발하는 것이 중심이기에. 어떤 옷을 걸쳐 입는가가 다를 뿐 정서라는 몸을 감싸는 것이기는 여느 시나 마찬가지다. 다만 방주현이 걸친 옷이 화사한 외출복이 아니라 그저 늘 입고 다니는 일복이라는 점. 장식도 없고 실용에 맞춘 언어의 옷을 걸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따른 방주현 동시의 특성은 그의 시가 친절하지 않다는 점이다. 많은 빈틈을 일부러 배치하고 있다. 이 시에서는 제목과 본문 사이의 빈틈이 아주 넓다. 어떻게 연결되는지 독자들은 궁구해야만 한다. 빈틈을 채우는 것은 독자의 몫이며, 그 빈틈이 넓고 깊을수록 그것을 채우는 독자의 능동적인 읽기는 한층 활성화될 것이라 시인은 믿고 있다. 이는 바로 앞에서 언급한 객관적인 기술과 맞물려 지적 탐구를 이끌어내며, 저마다 다른 음영으로, 깊이로 시를 읽을 여지를 남겨둔다.
그러나 이 모든 시적 특성들, 현실, 삶, 묘사, 빈틈 등은 사실 동시의 특성이라기보다 시의 특성이다. 이 한편의 작품만으로도 그의 시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시란 무엇이며, 동시란 또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인 질문. 그의 시에 나타나는 미적 자질들이 허용될 수 있는 자질들인지 아니면 동시의 경계를 확장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동시 자체를 홀대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우려에 우리는 직면하게 된다. 목욕물과 함께 아이까지 내다버리는 것은 아닌지 하는 염려가 왈칵 몰려든다.
4.다른 작품들을 통해 앞의 추정을 확증한다
앞에서 한 편의 동시 「학부모 공개 수업」을 통해 동시집 『내가 왔다』의 얼개를 그려 보았다.
방주현의 동시에는 쓸쓸하고 안타까운 현실이 존재한다.
방주현의 동시는 아이와 어른을 굳이 경계로 울타리를 치지 않는다.
방주현의 동시는 감정을 가능한 한 배제하고 있다.
방주현의 동시에는 채워 넣어야 할 여백이 많다.
방주현의 동시는 시란, 동시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담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시적 특성, 혹은 시인의 특성은 다만 추측일 따름이다. 작은 씨앗에도 온 우주가 깃들기도 하지만 열매나 이파리만 보고서 나무를 다 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경개를 그리지 않고 개별적인 작품들만을 나열할 수만도 없기는 하다. 우리의 목표가 감상문을 쓰는 것이 아니라 에세이를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무를 통해 숲을 알고, 다시 숲을 통해 나무를 보며, 다시 다른 나무를 보며 숲을 새롭게 규정하고, 그 눈으로 다시 나무를 보고, 다시 숲을 생각하는. 부분과 전체의 쉼 없는 변증법이야말로 비평적 에세이를 쓰는 방법이다.
방주현 동시가 가진 여러 특성들 중 현실과 뚜렷하게 밀착된 작품들은 한결 같이 순도가 높다. 「소망빌라 5층 꿈탑」, 「치킨 치킨」, 「독감」 등의 작품이다.
치킨 치킨
아빠, 치킨 사 줘!
치킨집이 새로 생겼어.
오늘은 개업이라 한 마리 사면 한 마리 더 준대.
지난주까지 속옷 가게 하던 자리야.
아니, 거긴 떡집이었다가 지금 화장품 가게고.
아니 아니이. 홈플러스 옆에 까페 하다가 반찬 가게 하다가 핫도그 파는 자리 왼쪽 말이야.
맞아, 거기!
다른 가게로 바뀌기 전에 얼른 사줘.
이 짧은 한 편의 시가 담고 있는 현실은 소상공인들의 세계다. 이른바 자영업자들의 세계. 새로 치킨집이 생겼고, 그곳은 속옷 가게가 있던 자리다. 그 옆에는 떡집에서 화장품 가게로 바뀐 집이 있고, 그 옆에는 까페에 반찬가게에 지금은 핫도그를 파는 가게가 있다. 물론 새로 문을 연 치킨 집도 다른 가게로 언제 바뀔지 알 수 없다. 이처럼 빠르게 생겼다 사라지고 생겼다 사라지는 통에 동네에서는 인테리어 업자와 그릇 가게만 활황이란 말이 떠돌 지경이다. 그러나 동시는 이 모든 사태들에 대해 묵묵부답이다. 그저 아이의 발화를 통해 현실은 우회적으로 표현된다. 그렇다고 시인의 안타까운 소회가 아이의 성화 속에 묻히지는 않는다. 그런데 과연 동시의 주인인 어린 독자들은 이 시에 담긴 안타까움을, 비판적 거리를 감지할까? 말 그대로 이 시의 주제는 독자들에게 적절하게 다가가 웃음 뒤에 쓰디쓴 현실을 어렴풋이나마 감지할 수 있을까? 그 뒤에 이어지는 조류독감과 살처분을 다루고 있는 동시 <독감>은 정확하게 어린 독자의 마음속에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인간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안착할 수 있을까?
나는 동시를 쓰는 시인이 현실의 어린이가 지닌 평균적인 이해와 공감에 맞춰 시를 써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시는, 문학은, 예술은 있어야 할 자리를 앞질러 환하게 밝힐 수도 있으며, 무릇 아동문학이란 현실의 거울 같은 반영이 아니라 등불 같이 환한 삶의 순간을 그려 보이기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틀에 박힌 예쁜 아름다움이 아니라 근저를 뒤흔드는 고통을 감지하는 것 역시 아름다움일 수 있다. 그럼에도 언뜻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이 시들을 앞두고 어린 독자들이 그래도 찬찬히 생각에 생각을 이어가다 보면 이윽고 시인의 안타까운 마음에 가 닿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사실 동시가 현실의 고통을 표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방주현은 그 시도를 밀어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없던 것을 노래한다고 해서, 그 노래의 아름다움이 절로 보증을 얻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친절을 가장하면서 모든 것을 공공연하게 명시적으로 밝혀보이는 시들이 한눈에도 뻔한 시가 되고 마는 실패를 우리는 많이 보아 왔다. 그런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위해 방주현은 현실에 밀착된 시일수록 오히려 빈틈과 여백을 풍부하게 배치하고 있다. 그 결과는 과연 소망스럽게도 효과적으로 의도를 관철하고 있는가? 답이 쉽지도 간단하지도 않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방주현의 동시가 어렵지만 모호하지 않다는 것, 내재된 의미가 수수께끼처럼 비틀려 있지 않고 명료하다는 것, 그러니 내재적인 완결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그 점이 어린 독자들의 시적 능력과 연결되기를 그 누구보다 나는 바라는 바이다.
5. 또 다른 시적 특성이 있는지 찾아본다
앞에서는 방주현 동시의 한 경향만을 문제 삼았다. 또 다른 경향이 있는지 밝혀야 하며, 이를 나는 어린이가 등장하는 작품에서 찾는다.
방주현의 동시에 현실적 삶의 고단함이, 힘겨움이 자리 잡고 있다고 했는데, 이는 아이들의 삶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다. 아이들 역시 힘겨운 삶을 마주 대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혼자 갈 수 있다」의 화자는 이제 겨우 입학식 다음날인데도 마중 나온 사람이 없다. ‘다 재미있고/ 다 기대되는 길’이라 「고민」이라는 시도 있고, 「손톱 깎기」처럼 정든 짝꿍과 헤어지기도 고, 「교문 거북이 살아남기」처럼 무거운 등딱지를 메고 학원으로 끌려가기도 한다. 「전학」에서 전학 간 친구를 모두들 언제 있었느냐는 듯 잊고 말 듯 한 달 후에 전학 가는 자신 또한 잊혀지리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기도 하다. 그러나 어른들이 진정성을 지닌 채 쌓다가 허물기는 하지만 꿈을 간직하고 살아가듯 아이들 또한 자신들의 숨 쉴 틈을 스스로 만들며 고단한 일상을 밀어간다.
훈이
훈이가
슬러시를 껴안고
자전거를 끌며
천천히 걸어간다
가다 멈춰
슬러시 한 모금 먹고
조심조심 자전거 페달에 오른발을 올린다
잠깐 기우뚱했지만
이내 왼발로 페달을 밟는다
자전거가 앞으로 나간다
영어 학원 가방 멘 훈이가
오른손으로 자전거 핸들을 잡고
왼손으로는 슬러시를 껴안고
자전거를 타고 간다
보는 어른마다
걱정스럽게 쳐다보지만
훈이 자전거는 계속
앞으로 간다
가끔 흔들리면서
방주현은 아이의 삶을 담고자 할 때에도 섣불리 아이의 시선인 양 꾸미지 않는다. 그저 관찰자로서 보고 들은 것만을 담담히 기록할 뿐이다. 그러나 그 객관적 기술이 지극히 주관적이며 가치평가적임은 물론이다. 「훈이」에서도 훈이는 자신의 시선으로 보고,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물은 결코 대상화되지 않는다. 주체로 우뚝 서 있다. 처음엔 ‘천천히 걸어’가던 훈이는 오래지 않아 한 발로 페달을 밟고, 급기야 자전거를 한 손으로 타고 간다. 서둘러 갈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급한 마음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훈이는 슬러시를 즐기는 자신만의 시간도 포기하지 않는다. 늦지 말아야 한다, 학원에 가야 한다는 당위의 세계와 슬러시 하나 마음 편히 먹을 시간이 없다니, 그래도 나는 먹고 말겠다는 욕망의 세계가 맞선다. 시는 그 어느 한 편을 일방적으로 응원하지 않고, 무언의 맞섬을 있는 그대로 기술할 따름이다. 시인은 결코 여느 어른들처럼 걱정하지 않는다. ‘가끔 흔들’려도 훈이와 훈이의 자전거와 훈이의 슬러시는 ‘앞으로 간다.’
6. 본문을 요약하며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한다
여기까지가 방주현 동시집에 나타나는 특성을 밝힌 것이다. 삶을, 삶의 현실을 노래하는 것이 그이의 시가 지닌 특징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아이도 어른도 어떤 차별도 없이 나란히 존재한다. 아이의 분홍빛 삶이 따로 있고, 어른들의 회색으로 덧칠된 삶이 따로 있다고 시인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삶이란 커다란 화폭 위에 아이들이, 어른들이 함께 살아간다. 굳이 말을 섞거나 굳이 개입하지 않은 채 따로 또 열심히 살아간다. 어른들은 ‘학부모 공개 수업’을 눈으로만 쫓아 먼데 하늘을 보고, 아이들은 슬러시를 꼭 그러쥐고 자전거를 타고 학원으로 달린다. 그리고 시인은 이들 각자의 세계에 대해 이러저러한 평가를 늘어놓지 않는다. 감정을 최대한 억제함으로써 고통을 음화로 그려낸다. 그럼에도 희망은 곳곳에 ‘콘센트 위 5밀리미터 난간’일지라도 ‘안전하게 착지’(「착지」)하고 있다.
끝으로 한 가지 더.
이제 마지막으로 문제점도 지적해야 한다. 어찌 한 편의 시집에 담긴 시편들이 다 좋을 수 있을랴.
물론 그의 시에도 허술한 구석이 작지 않다.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쓴 작품도 적지 않으며, 이미지가 혼란스러운 나머지 일상의 틀을 깨는 신선함을 지워버릴 정도로 혼란을 보이기도 한다. 명시적인 주제의 전달을 피하려는 의도 때문에 그저 모호한 채 남겨진 작품들도 눈에 띈다. 그리고 공유된 배경 지식이 아닌 개인적인 맥락이 압도적인 나머지 시의 깊이가 충분히 전달하지 못하는 작품도 있다.
바위
별이 되었을 거래요
천사가 됐을지도 모른대요
새로 태어났을 거라고도 해요
다 틀렸어요
언니는 바위가 됐어요
우리 가슴에 들어앉은
커다란 바위
짐작컨대 4.16 세월호를 얘기하고 있는 작품일 것이다. 내게도 세월호는 ‘커다란 바위’처럼 가슴에 얹혀 있다. 시인도 그러한가 보다. 그런데 정작 언니는 ‘바위’가 됐다고 말하는 것은 ‘가슴에 커다란 돌덩이가 얹혔다’는 어른들의 수사를 어린 화자의 인식으로 치환하는 것이다. 굳이 명시적인 화자를 설정하였음에도 시적 화자와 시인이 동일시된 나머지 어린 화자의 목소리, 어린 관찰자의 시선이 무색해지고 말았다. 그 혼란은 시의 리얼리티를 현저히 떨어뜨린다.
모든 시집에는 저마다의 아쉬운 점을 안고 있다. 이 아쉬움을 피력하지 않으면, 그것은 비평적 에세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얼핏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박박 긁어서라도 찾아내야 한다. 비평적 에세이는 독자를 향한 글이기도 하지만, 에둘러 시인을 향한 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7.전체적인 결론
『내가 왔다』는 아주 독특한 시집이다. 동시의 통념과 맞선 흔적이 곳곳에 여실하다. 무엇보다 그이는 동시를 어린이의 세상을 그려내는 것이라 단정 짓지 않는다. 어린 독자들이 주요한 독자일지라도 그의 동시는 삶 전반을 향하고 있다. 이는 자칫 시와 동시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어린이를 일정한 틀 아래 가둔 채 계몽의 대상으로 설정하지 않는 이점을 지닌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방주현은 제대로 된 계몽주의자인 셈이다. 계몽적 기획 아래 설정된 큰 밑그림에도 불구하고 세부 묘사는 담백하고 감정의 개입을 최대한 억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방주현을 좋아한다. 나 또한 어쩔 수 없이 계몽주의자이며, 문학의 다른 이름이 희망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 희망에 기대 그이는 오늘도 시를 읽고, 쓰고, 살고 있을 것만 같다. 방주현의 동시여, 축복 있으라.
(끝을 그냥 이렇게 마무리짓는다. 글 전체가 그 자체로서 깨달음이든 감동이든 뭔가가 부족하다. 그렇다고 계속 붙잡고 있을 수만도 없다. 에세이는 게릴라와 같아서 적재적소에 빠르게 발언해야 한다. 완벽을 기하려고 때를 놓치면, 글의 의미는 밋밋해지고 만다. 글이란 무릇 무엇을 말하는가도 중요하지만 언제 말하는가도 역시나 중요하다. 그러니 오늘의 비평적 에세이 쓰기 수업은 여기까지. 에세이 쓰기의 과정을 보려주려고 했는데, 시작하자마자 길을 잃고 우왕좌왕. 흐흐, 인생이 그런 법이니 이것 또한 배울 수 있기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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