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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 전 연재/동시 에세이

동시, 덜 것도 더할 것도 없는 작고 단단한

by 도서출판 상상의힘 2024. 11. 3.

 

 

1.왜 동시를 읽어야 하는가?

1.1 시가 내게로 왔다

2.동시란 무엇인가?

2.1 동시? 좋은 동시란 무엇인가?

2.2 동시, 덜 것도 더할 것도 없는 작고 단단한

3.동시를 읽는 즐거움 - 작품과 작가

3.1 비평적 에세이 쓰기의 실제 – 방주현의 『내가 왔다』를 통해

4.교실에서 동시 읽기

 

 

동시, 덜 것도 더할 것도 없는 작고 단단한

 

1.

 

흔히들 하는 말로 작은 모래알 하나에도 우주가 담겨 있다고들 한다. 사실 잘 모르겠다. 한 알의 모래알에도 지질학적인 성분들이 함유되어 있으며, 거대한 암석이 풍화와 침식을 겪는 가운데 마침내 한 톨 모래알로 변화되기까지의 과정이 각인되어 있기는 할 것이다. 그래도 모래알에 우주가 담겨 있다는 말은 아무래도 과장인 듯싶다. 모래알에는 우주라기보다 지구가 담겨 있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씨앗은 다르다. 작은 겨자씨 한 톨에도 생명이, 우주가 담겨 있음은 절대 부인하기 힘들다. 겨자씨는 알고 있다. 언제 싹을 틔울지, 언제 뿌리를 내리고, 어디로 줄기를 뻗을지, 또 꽃을 어떻게 피울지, 열매는 어떻게 영글지, 다시 씨앗으로 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 작은 겨자씨는 전부 알고 있다. 어찌 놀랍지 않으랴. 의당 생명의 경이, 우주의 신비가 이 작은 씨앗에는 깃들어 있기에.

한 편의 동시도 그러하다. 인간이 쌓아올린 모든 지혜가 한 편, 한 편의 동시에는 온축되어 있다. 생명이 신비롭듯 동시 또한 언어로 쌓아올린 신비로운 한 세계를 이루고 있다. 자음과 모음이 만나, 낱자와 낱자가 만나, 낱말과 낱말이 만나, 문장과 문장이 만나 마침내 한 편의 동시가 우뚝 선다. 시가 그러하듯 동시 또한 사물에 대해, 세상에 대해, 사람됨과 삶의 가치에 대해 나름의 세계를 체득한 시인이 빚어낸 한 세상이다. 그리고 시인은 이 모든 일을 다른 문학이 그러하듯 모국어를 매개로 감행한다. 

모국어에는 모국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수 천 년을 축적해 온 문화적 유산이 각인되어 있다. 예컨대 ‘작은 겨자씨’란 비유 혹은 사실만 해도 그렇다. ‘~에 우주가 담겨 있다’는 진술의 효과는 오직 ‘겨자씨’만이 제대로 감당할 수 있다. 북극곰도, 고릴라도, 귀신고래도 우주를 담을 수 있겠지만 모국어는 ‘겨자씨’를 강요한다. 오직 그것만이 의미를 극대화하기 때문이다. 우리 속담에는 ‘울며 겨자 먹기’가 있다. 마지못해 하는 일을 가리킨다. 물론 다른 의미로 쓰인 것이지만 적실한 다른 속담도 있다. ‘겨자씨 속에서 담배씨를 찾는 격’이란 말이 있다. 둘 다 작고 작은 것들인데, 가려내려는 일이 도대체가 불가능함을 뜻한다. 우주와 연결된 또 다른 겨자씨는 주로 불교나 기독교의 경전에 나온다. 불교에서는 겁(劫)이란 시간 길이를 설명하며, 그릇에 수북하게 담긴 겨자씨를 100년에 한 알씩 덜어낸다고 할 때 그 그릇이 모두 비워지는 시간을 겁이라고 한단다. 기독교에서는 겨자씨만한 믿음, 작고 단단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긴다고 했다. 또 흡혈귀들은 겨자씨를 싫어하는데 뿌려놓으면 일일이 하나하나 치우기 위해 줍느라 밤을 꼬박 새운다고 한다. 공치는 날인 것이다. 모두 너무나 작은 것이란 의미가 담겨 있다. 이 모든 의미들이 겨자씨란 낱말에는 스며들어 쌓여 있다.

하물며 낱말 하나가 그러할진대 한 편의 동시는 어떠하랴. 당연히 한 세상이 온축되어 있다. 그러나 동시에서 온축되어 있다는 의미는 큰 것을 작게 압착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 자체가 아주 작은 모래알, 아주 작은 비늘 조각[片鱗 편린], 아주 작은 씨앗이다. 그럼에도 우주를 담고 있는 것이다. 말 그대로 겨자씨 같은 것이다. 그러자면 단단해야 한다. 작디작은 것에 우주를 담으려면 당연 쓸모없는 것이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 당연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빠져서도 안 된다. 덜 것도 더할 것도 없는 완벽한 한 세계가 예술의, 문학의, 시의, 동시의 본질이다.

 

2.

 

잘 빚어진 항아리, 신비평 이론가로 잘 알려진 클리언스 브룩스가 규정한, 시를 일컫는 비유다. 항아리는 기능적이든 장식적이든 생활의 도구였는데, 그 가운데 어떤 것들은 기어이 예술 작품으로 발돋움한다. 잘 빚어진, 더할 것도 덜어낼 것도 없는 작품. 그저 내뱉는 말이고 끄적인 문장인데, 그 말이, 문장이 시로 움튼다. 꽃을 피우고, 한 세상에 빛을 던진다. 누군가의 마음에 씨앗으로 박힌다.

 

학부모 공개 수업

 

장미 다발을 들고 비닐하우스에서 나오던 팜티마이 아줌마

수학 문제를 설명하던 6학년 2반 이서연 선생님

서류 가방 들고 걸어가던 김유성 아저씨

마을버스를 운전하던 박미양 기사님

모두들 일하다 멈춰 서서

먼 데 하늘을 보는

11시 무렵

 

방주현, <내가 왔다>, 문학동네

 

학부모 공개 수업. 아이들도 선생님도 긴장되는 시간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렇게 공부하고 있습니다 보여주는 시간이다. 처음은 아니지만 그래도 언제나 조금 낯설다. 교실에는 병풍처럼 어른들이 빙 둘러 서 있다. 학부모들이다. 떨리는 시간이다. 선생님도, 아이들도. 인생에는 늘 그런 시간들이 있다. 마음 졸이는 시간.

그런데 이 동시에는 교실 풍경이 없다. 배경이 교실이 아닌 바깥이다. 일터다. 그 일터에서 저마다의 일을 하고 있는 이들이 차례로 호명될 따름이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 ‘멈춰 서서/ 먼 데 하늘을’ 본다. ‘11시 무렵’. 어떤 생각으로 하늘을 볼까? 어떤 마음일까? 나는 이들의 마음을 다 알 것만 같다. 작은 한숨소리도 다 들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얼핏 스쳐가는 마음속 웅크린 미안함도 꼭 내 것만 같다.

이 시는 ‘학부모 공개 수업’하면 떠올릴 수 있는 모든 통념을 거부한다. 선생님의 가르침과 아이들의 배움, 그 사이사이에서 터져 나오는 학부모들의 짐짓 과장된 웃음과 안으로 삼키려 하나 터져 나오는 안타까운 탄식, 손 한 번 들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 있지만 사랑스러운 내 아이의 뒤통수, 그래도 그새 또 많이 컸음을 발견하는 안도감 등. 가만히 들여다보면 공개 수업의 곳곳에는 동시가 꿈틀거리고 있을 터이다. 그러나 시인은 존재하는 이들이 아닌, 부재하는 이들을 상상한다. 그런데도 그 상상은 너무나 생생하다.

이 동시는 ‘잘 빚어진 항아리’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잘’ 다듬어져 있기도 하다. 행이 저마다 심리적 등장성, 같은 심리적 길이를 갖는다면, 첫 행은 빠르게 달려 나간다. 그리고 조금씩 느려진다. 마지막 행은 아주 느린 나머지 거의 멈춰 서 있을 지경이다. 또박또박 방점이 찍힐 만큼 점점 천천히 흐르다 이윽고 ‘11시’에 멈춰 선다. 통사 구조의 균질성도 눈에 띈다. ‘일하던’으로 포괄되는 구체적인 동작상들이 동일하게 나열되고, 점차 짧아지는 이 수식(修飾)은 모두 이름을 초점화한다. 외국인 노동자, 선생님, 아저씨, 기사님 등 일터의 일과 이름은 심지어 섣부른 계급성을 지우고, 학부모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게 해 준다. 좋은 시다. 미처 생각지 못했던, 생각했으나 무심히 으레 그러려니 했던 이들의 속사정과 속마음을 눈앞에 딱 불러 세우고 있다. 삶의 본질을 움켜쥐고 있다. 좋은 동시이기도 하다. 오지 못한 엄마와 아빠가, 사정은 알면서도 못내 서운한 아이들 앞에 슬쩍 내밀며, ‘어라, 오늘 교실에서 있었던 일을 쓴 동시가 있네. 읽어 볼까.’하고 함께 읽고 싶은 동시다.

더욱이 이 동시의 의미는 한 점에 응축되어 있다. 무릇 시는, 동시는 이래야 하는 법이다. 작은 겨자씨만큼 작아야 한다. 바늘로 콕 찔러 생겨난 구멍 같아야 한다. 하수구처럼 뻥 뚫린 구멍이나 제멋대로의 모양새를 갖춘 아궁이의 구멍 같은 것이 아니다. 바늘로 찌른 듯한 구멍이어야만 한다. 이 구멍을 통해 의미의 빛이 독자에게로 날카롭고 선명하게 가 닿아야 한다.

다음의 시는 어떨까?

 

달과 밤

 

1.

그 아이는 집 밖으로 나가면 달이 되었다.

 

아무도 따라올 수 없는 곳까지 걸었다.

 

 

집으로 돌아오면 그 아이는 밤이 되었다.

 

아무도 알아볼 수 없는 곳에서 울었다.

 

2.

 

그 아이가 나인지, 내가 아는 다른 아이인지

그건 잘 모르겠다. 그러나 딱 한 가지는

확실한 것 같아서 이렇게 썼다.

-아무래도 좀 더 사랑을 

받아야 함.

 

김륭, <동시마중>, 2024년 3/4월

 

우리 동시단의 한 켠을 튼실하게 지켜내고 있는 시인의 동시다. <동시마중>의 편집위원이기도 하니, 지금 여기 동시의 한 지평을 밀어나가고 있음을 자타가 공인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리라. 이제 갓 시를 꿈꾸는 시인들의 작품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책을 잡는 노릇이 면구스러운 일이기도 하거니와 논의의 디딤돌 삼아 이 동시를 바탕으로 생각의 실마리를 펼치는 것 정도는 시인이 이해해 줄 법도 하다. 더욱이 이 동시는 같은 잡지의 다음 호, 김준현의 격월평에도 등장하니 다른 시각으로 논의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김준현은 ‘환상과 현실이 동일한 물적 토대-즉, 화자가 진정으로 느끼는 감정을 매개로 동일한 층위에 놓인다면-’라고 전제하며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화자가 진정으로 느끼는 감정’이 환상과 현실의 ‘동일한 물적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환상은 ‘무력한 현실을 버려둔 채’ ‘위로를 제공하는 기능’, ‘지극히 좁은 범위의 자리만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생각의 단초를 펼쳐놓은 메모와 같은 글이라 언급하고 있지만 적어도 이 대목을 읽는 순간 비평을 쓰는 김준현의 문제의식을 높이 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는 이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바 크기에 해결책으로 제시된, ‘화자가 진정으로 느끼는 감정’의 실체가 궁금해졌다.

김준현은 이 시에서 ‘달’과 ‘밤’을 동일한 의미의 축선 상에 두고 있다. 동일한 의미의 변주로 읽은 다음 ‘개기월식’의 이미지, 두 번째 사람을 자의적으로 기묘하게 설정하고 ‘세 번째 사람’으로서의 어린이-페리 노들먼의 ‘숨겨진 어린이’를 차용한 것으로 보이는-를 설정한 논의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그리하여 ‘그 어떤 빛도 받지 못하는 세계의 어린이들을 모두 “달”이 된 “나”로 수렴’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이 동시가 고통 받는 모든 아이들을 나와 동일시하고 나로 수렴한다는 것이다. 과연 이 동시에 ‘화자가 진정으로 느끼는 감정의 실체’가 담겨 있는 것인지 다시금 궁금해졌다. 비록 김준현은 ‘개기월식의 이미지로도’, ‘어린이를 보았을지도 모른다’ 등으로  쉼 없이 자신의 진술이 단정적이 아님을 피력하고 있으며, ‘“사랑”이란 빛을 내리쬐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존재로서 인정해 주고 품어주는 일’이 먼저라고 넌지시 충고를 밀어 넣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달과 밤」이란 이 시가 그렇게나 깊은 의미를 갖는 것인지, 환상에 매달리는 우리 동시가 가야 할 방향인지, ‘환상과 현실이 동일한 물적 토대를 갖춘’ 작품인지 도무지 의아하기 그지없다. 오히려 나는 시 비평이 주례사 비평에 매몰된 나머지 그 누구도 시 비평을 읽지 않게 된 작금의 참담한 현실이 동시단의 머리 위에도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사실 나는 아직도 이 동시를 해독하고 있는 중이다. 이 시가 달과 밤의 의미 대립 속에 존재하는 것은 알겠다. 집 밖에서의 아이와 집에서의 아이가 대립된다. 집밖에서의 아이는 누구나 달을 우러러 보듯,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곳까지 걷는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면 아이는 달이 아닌 그저 캄캄한 밤이 되고 만다. ‘아무도 알아볼 수 없는 곳’에서 운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자아와 내면적 자아가 충돌한다. 그러나 달과 밤은 엄밀히 조응하지 않는다. 달이 구체인 반면 밤은 그저 막막한 어둠이란 배경이거나 어둠 속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달이 될 수는 있어도 밤이 되기는 어렵다. 아이의 모순되는 내면과 외연은 자아와 타자의 구분조차 지운다. 그리고 그 내면과 외연의 충돌 혹은 모순 혹은 일그러짐은 아직은 더 사랑을 받아야 함을 일깨운다. 모순 속에서 살아가는 아이, 나일 수도, 다른 아이일 수도, 누구나 그러하다는 자각, 그 아이에게는 사랑이 필요하다는 해법 등이 지금껏 내가 읽은 의미의 해석이며, 어쩌면 그 해석은 더 진행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이 해석은 맞을 수도, 맞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준거가 시인의 의도는 아님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그 준거는 오직 텍스트가 허락하는 한도 안에서 언어가 빚어내는 의미와 의미의 결합에 근거를 둔 해석이어야 한다. 김준현이 읽었듯이 ‘달’과 ‘밤’을 개기월식이란 현상을 바탕으로 동일한 반열에 나란히 세울 수도 있다. ‘따라올 수 없는’과 ‘알아볼 수 없는’을 동일한 양태의 변주로 읽을 수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따라올 수 없다’는 구절은 적어도 ‘따라오지 못하는’과 같이 다른 식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어’ 다르고 ‘아’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그 의미에 걸맞다.

이 시는 좋은 시일 수도 좋지 않은 시일 수도 있다. 다만 동시라고 흔쾌히 말하기는 적어도 필자에게 묻는다면 쉽지 않을 듯하다. 무엇보다 동시가 이렇게 어려운 얼굴을 하고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원래 시가 그렇듯 동시도 모호하고, 불가해함을 태생적으로 안고 있지 않느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단연코 나는 좋은 시가, 동시가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좋은 시는, 특히 좋은 동시는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아이들의 눈에 단박에 보이는 것이다. <학부모 공개 수업>처럼.

 

3.

 

동시의 의미는 무엇보다 명료해야 한다. 몇 번을 읽고 또 읽어야 겨우 갈피가 잡힌다는 것은 그만큼 명징하지 못하다는 증좌일 뿐이다. 시가 어려워지는 것은 전적으로 결여태이기 때문이지 독자의 의미 해석조차 미치지 못할 만큼 너무나 고상한 완전태이기 때문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한 시인의 궤적을 쫓아가 보고자 한다. 그 궤적은 시간에 따른 흐름이 아니다. 그저 동시의 의미가 드러나는 다채로운 양상을 한눈에 잘 보여주기 때문에 선택했을 따름이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거론할 뿐 그이의 동시를 폄하하거나 홀대하기 위함이 결코 아님이 온전히 전달되기를 바란다. 무릇 시인은 누구든 좋은 시와 그렇지 않은 시를 거듭 반복하여 쓰고 또 쓰기 마련이다. 언급할 시인은 강기원이다. 그이는 <동시마중>에 수록된 시들 중 언제나 맨 앞자리에 놓여 있다. 잡지가 가나다 순서로 시인들의 시를 수록하기 때문이다. 읽다가 멈추기도 하지만 그이의 동시는 어쩔 수 없이 매번 읽게 된다.

 

 

나도 그렸지

 

물고기를 그려 달랬더니

넘실거리는 파도만 그려 줬어

그 아래 청어 떼가 가득하다고

 

토끼를 그려 달랬더니

눈 쌓인 산만 그려줬어

눈 속에서 잠든 토끼라고

 

나비를 그려 달랬더니

꽃 한 송이만 그려 줬어

곧 날아올 거라고

 

그래서 나도 그렸지

굴러다니는 빨간 털실 뭉치를

 

그리곤 말했어

새끼 고양이야

강기원, <우리 여우 꿈을 꾼 거니?>, 문학동네, 2023.

 

이 시는 ‘나 양 한 마리만 그려 줘’라고 말하는 어린왕자를 떠올리게 한다. 이렇게 저렇게 그려 주었으나 어린왕자는 연신 도리질만 한다. 이윽고 짜증이 치민 서술자인 나는 아무렇게나 쓱쓱 상자를 그려준다. 그제서야 어린왕자는 양이 잠들어 있다고 목소리를 낮추는. 그처럼 겉으로 보이는 현상이 아닌, 그 속에 숨겨진 본질을 상상할 것을 요청한다.

‘넘실거리는 파도’와 ‘청어떼’, ‘눈 쌓인 산’과 그 속에 ‘잠든 토끼’, ‘꽃 한 송이’와 ‘곧 날아올’ 나비. 그예 참지 못하고 아니면 그린다는 것이 애초 그런 것이라면 나도 그릴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쓱쓱 화자는 ‘빨간 털실 뭉치’를 그린다. 과연 그 현상은 본질인 새끼 고양이와 어찌 연결될 수 있을까? 1연의 청어떼와 2연의 토끼는 색상의 유사성으로 숨은 그림 찾기와 같은 양태로 짝을 이룬다. 3연의 나비와 5연의 새끼 고양이는? 3연과 5연의 나비, 새끼 고양이는 은유가 아닌 환유로 연결된다. 꽃을 찾는 나비와 털실을 가지고 노는 새끼 고양이.

그런데 이 환유로 연결된 털실과 새끼 고양이는 꽃과 나비의 짝과 명료하게 조응하지 않는다. 적어도 표현상으로는 털실 자체가 새끼고양이로 은유적으로 지칭되고 있기 때문이다. ‘새끼 고양이가 곧 놀러 올 거야’라고 말하는 것이 변주 없는 반복이라 생각했기에 비틀어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제대로 표현되지 못한 것만은 어찌할 수가 없다. 

시에서의 언어는 자물쇠를 여는 열쇠 같은 것이어야만 한다. 그 어느 작은 톱니 하나 누락되거나 달라져서는 열리지 않는다. 시적 여백을 살린 압축적 표현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시의 압축적 표현은 말 그대로 압축이지 건너뛰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맞지 않는 것이 그럴 듯한 미적 장치라고 우겨서도 안 된다. 

소통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할 것. 소통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히 표현되었는지 거듭 반추할 것. 독자의 입장에서 제대로 전달될지 추체험할 것. 더러 의미를 숨겨둘 수는 있지만, 의미를 완전히 배제하거나 건너뛰고서는 좋은 시가 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할 일이다.

 

우는 허물

 

8월의 끝, 처서 무렵

 

매미 허물이 울어요

빈 눈알이 툭 튀어나온

매미 허물이 울어요

 

매미는 벌써

짝을 찾아 떠났는데

 

남겨진 허물이

나무 붙잡고 울더니

바닥에 내려와서도 

엎드려 울고 있어요

 

이제 그만 울라고

개미들이 데리러 올 때까지

 

가는 여름이 서운해

텅 빈 허물이 

울고 있어요

강기원, <동시마중> 2024년 7/8월호

 

시를 읽어가면서 든 생각은 놀랍다는 것이었다. 놀라운 소재이며, 놀라운 상상력이었다. ‘매미 허물이’ 운다니. 배경을 제시하고-이 배경이 다소 불편하기는 했다. 처서까지 매미 허물이 나무에 붙어 있을 리가 없을 뿐더러, 마지막 연을 예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곧 이어 단도직입적으로 ‘매미 허물이 울어요’라고 말하다니. ‘빈 눈알이 툭 튀어나온’도 얼마나 적실한 묘사인가. 반복과 의미의 강화. 그뿐만이 아니다. 매미는 떠났는데, 허물이 허물만 남아 울고 있다고 한다. 얼마나 간절하기에 빈 껍질인 허물이 울 수 있단 말인가. 더욱이 허물은 나무를 붙잡고 울고, 바닥에 내려와서는 엎드려 울기까지 한다. 점점 울음의 강도가 드세진다. 심지어 개미들이 그만 울라고 달래며 데려가기까지. 압도하는 시였다. 여기까지는. 반복과 변주, 심화와 고양이 동시에 일어나는.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까지 허물이 우는 이유를 밝히는 지점에서 나는 좌절했다. 시인은 ‘가는 여름이 서운해’로 이유를 제시한 후 다시 한 번 ‘텅 빈/ 허물이 울고 있어요’로 온전하게 마무리 짓고 있기는 했다. 그럼에도 나는 아쉬웠다. 이렇게나 간절하게 우는 울음이 ‘가는 여름이 서운해’서라니. 기왕에 거짓말을 하기로 했으면 누구라도 깜빡 속을 만큼 완벽하게 거짓말을 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가는 여름’은 그저 자연의 흐름일 뿐, 그 어떤 시적 왜곡도 아니다. 거짓말이 아닌 것이다. 물론 필자라고 해서 뾰족한 해결책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아쉬울 뿐이다. 정말 좋은 시가 되었을 텐데. 평생에 한번 쓸까 말까 한 시. 우리나라 동시인들을 모두 한 자리에 불러 모은 다음 첫 연을 덜어내고, 마지막 연의 첫 행을 채워 넣는 경연대회라도 열고 싶은 심정이다. 물론 그 시의 소유자는 당연히 강기원 시인이다. 그만큼 구성이 탄탄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시 쓰고 싶은 시다. 그러나 시는 한번 발표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상상력의 바닥이 거기까지인 것이다. 시집으로 엮어낼 때 조금의 손질은 가능하지만, 또 수정하여 수록한다고 해서 탓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니 처음 발표하기 전에 계속 붙잡고 고쳐 쓰고, 고쳐 쓰고. 마침내 그래 이것이야 라고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상상력을 띄워 올리고 밀어 올려야 하는 법이다. 말이니 쉽기는 할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시적 상상력이 멈추는 지점, 멈추는 순간을 지켜보는 것은 안타깝고 마음 쓰리다.

그래도 다음과 같은 동시가 있어 조금 위안을 얻는다.

 

여름, 풋

 

그놈의 매미

갑자기 큰 소리로 울어 대는 통에

 

풋잠 든 아기가 깨어나

매미보다 더 크게 울어요

 

얼빠진 풋밤이 놀라

파랗게 떨어져요

 

풋감은 꼭지째 떨어져 감또개로 

떫게 구르고요

 

고추밭 풋고추는

독 오른 앙심을 품지요

 

겸손해지려 애쓰던 풋벼는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깍지 속 풋콩은 튀어 오르다

이마를 부딪쳐요

 

턱 받치고 졸던 다온이가

벌떡 일어나 컹컹거리면

 

그놈의 매미, 저도 놀라

더 크게 울어제끼는

 

여름 한낮이에요

 

강기원, <동시마중> 2023 7/8

 

아주 단정한 동시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류선열의 어투가 생각나기도 한다. 시에는 여름 한낮의 온갖 풋것들이 소환되고 있다. 말놀이를 적재적소에 구사하면서 제목에 맞춤한 동시 한 편이 풋풋하게 영글었다.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는. 온갖 풋것들이 생동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좋은 동시다. 좋은 동시는 그저 읽으면 그만이다. 따로 무언가를 설명하는 것이 마치 뱀 발을 그리는 것만 같다.

 

4.

 

동시는 문학작품 가운데 가장 어린 녀석이다. 말 그대로 어린이다. 그런데 어린이를 보는 아주 그릇된 두 가지 관점이 있다. 하나는 어린이를 덜 자란 어른으로 보는 것이다. 부족한 점이 많은, 어린 어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린이는 어른이 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인생의 한 단계를 살아가는 존재일 따름이다. 그냥 어린이인 것이다. 그냥 동시인 것이다. 시가 되기 전단계가 동시는 아니다. 

또 다른 하나는 어른과는 아주 다른, 맑고 순수한 존재라는 것이다. 거짓말이다. 어린이는 어른과 아주 다른 별종의 인간이 아니다. 그 어린이는 사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을 유치원에 다니면서 이미 모두 배운 터다. 영악하고 잔혹한 것까지. 어른과 다르다면 순수해서가 아니라 삶의 경험이 다르기 때문이다. 일터가 아니고 학교를 다니듯이. 시와 동시의 차이도 그러하다. 담아내는 삶의 경험이 다를 뿐이다. 동시는 시가 되기 위한 전단계도 아니고, 시와 아주 다른 맑고 곱고 귀여운 장르도 결코 아니다. 그저 담아내는 삶의 경험이, 그 경험을 응시하는 시선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시와 동시는 문학이란 점에서 동질적이다. 그리고 모든 문학은 의미의 완결성을 지향한다. 무릇 의미를 지향하는 모든 문학 활동은 소통을 위함이다. 달리 말하면 이데올로기적인 실천이다. 아니,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실천이 되기를 갈망하는,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이데올로기적 실천이다.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기획이다. 양보에 양보를 거듭하여 세상을 바꾸지는 못할지라도 누군가의 마음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고자 하는 말이다. 이를 위해 시의 말은, 동시의 말은 단 하나의 집약된 의미를 지향한다. 아주 작고 단단한 한 마디 말. 여러 가지 말을 결코 한꺼번에 쏟아내지 않는다. 오직 한 가지 전언을 말할 따름이다. 하나의 의미를 전달해야 한다. 한 편의 시, 한 편의 동시에 단 하나의 진실만.

그 진실을 온전히 언어로 전하기 위해 동시는 부족해서도 넘쳐서도 안 된다. 원래 잘 빚어진 항아리는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게 빚어낸 항아리다. 더러 파격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조차 특정한 항아리, 아주 특별한 그 항아리가 허락하는 정도 안에서의 파격일 따름이다. 동시는  작은 바늘 구멍을 통과하는 빛 같아야 하며, 작은 겨자씨 같은 것이어야 한다. 

우주를 담고 있는 한 톨의 겨자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