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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 전 연재/동시 에세이

운율, 동시의 가장 종요로운 특성

by 도서출판 상상의힘 2025. 3. 17.

1.왜 동시를 읽어야 하는가?

1.1 시가 내게로 왔다

2.동시란 무엇인가?

2.1 동시? 좋은 동시란 무엇인가?

2.2 동시, 덜 것도 더할 것도 없는 작고 단단한

2.3 동시의 율격

3.동시를 읽는 즐거움 - 작품과 작가

3.1 비평적 에세이 쓰기의 실제 – 방주현의 『내가 왔다』를 통해

4.교실에서 동시 읽기

 

 

운율, 동시의 가장 종요로운 특성

 

1.

예전, 마당 한쪽 귀퉁이에 화장실이 있던 시절의 이야기다. 밖에서 문을 두드리기라도 하면 엉거주춤 오리걸음으로 두어 발짝 걸어 나가야만 대꾸를 할 수 있었던 화장실. 그런데 미처 응답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면…….

문을 연 사람, 안에서 일을 보던 사람, 다시 겸연쩍게 문을 닫는 사람은 똑 같은 말을 하며 서로 수인사를 나누었다는. 그 똑같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똥 눠?

똥 눠.

똥 눠!

 

물음과 대답, 그리고 명령 혹은 승인. 이 모든 것은 억양만 다를 뿐 같은 낱말이다. 그리고 이 문장의 억양은 문장부호에 기인한다.

그러나 억양을 표현하는 것은 문장부호뿐만이 아니다. 사실 우리말의 낱말 자체에도 어조와 억양이 있다. 높낮이, 길고 짧음, 셈과 여림이 있다. 이를 잘 살리면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리듬감을 얻고 노래가 된다.

가수 장기하가 만드는 노래는 의식적으로 우리말의 이러한 특성을 잘 살리고 있다고들 한다. <우리 지금 만나>라는 곡의 노랫말은 앞 소절이 다음과 같다.

 

우리 지금 만나 (만나) 당장 만나 (당장 만나)

우리 지금 만나 (만나) 당장 만나 (당장 만나)

휴대전화 너머로 짓고 있을 

너의 표정을 

나는 몰라 (몰라 몰라 나는 절대로 몰라) 

우리 지금 만나 (만나) 당장 만나 (당장 만나) 

우리 지금 만나 (만나) 당장 만나 (당장 만나) 

말문이 막혔을 때 

니가 웃는지 우는지 

나는 몰라 (몰라 몰라 나는 절대로 몰라) 

아니 벌써 몇 분 째 

그렇게 가타부타 말도 없이 

그렇게 입 꼭 닫고 있으면은 

내가 뭐가 돼 

진짜 너 왜 그러는데 (돌겠네) 

아니 내가 귀가 뜨거워가지고 

그냥 전화기를 

왼쪽에 댔다 오른쪽에 댔다 

왼쪽에 댔다 오른쪽에 댔다 

이게 뭐야 이게 (미치겠네) 진짜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내가 정말 큰맘 먹고 

내가 물어보는 거거든 

내가 평소에 이런 말 하든 

너 계속 이럴 거면은 

우리 지금 만나 (만나) 당장 만나 (당장 만나) 

우리 지금 만나 (만나) 당장 만나 (당장 만나) 

<장기하, <우리 지금 만나> 부분 >

 

‘우리 지금 만나/ 당장 만나’는 노랫말이 아니라도 ‘지금 나/ 당장 나’로 액센트가 있을 터이다. ‘진짜 너 왜 그러는데’, ‘오른쪽에 댔다 왼쪽에 댔다’ 등등은 입말이 갖는 리드미컬한 억양의 오르내림을 노래 속에서 고스란히 반복하고 있다. 근래 발표된 이만교의 <말놀이> 역시 ‘웃기지 말라 그래!’가 리드미컬한 어조 속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남으로써 이와 같은 운율 효과를 거두고 있다.

노래 전체가 랩처럼 들릴 수도 있는 <부럽지가 않어>를 두고 장기하는 직접 “저 나름대로는 랩이라고 했는데, 딱히 라임이 없어서 랩이라고 생각 안 하실 수도 있어요. 말 자체의 운율을 살려서 했을 뿐이고, 사실 랩의 여러 가지 클리셰가 라임이라, 어떤 분들에게는 랩이고, 그렇지도 않을 수 있을 겁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노래 자체가 말 자체의 운율을 그대로 살려서 노래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사실이 그렇기도 하다. 

더욱이 그는 이 노래의 제목을 <부럽지가 않아> 대신 <부럽지가 않어>라고 정한 것에도 이유를 달고 있다. ‘않아’와 ‘않어’ 둘은 어떻게 다를까? “장기하는 이 노래가 부러운 마음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자신도 부러운 게 없을 리가 없지 않느냐고 얘기하며 제목에 대해서는 진짜 안 부러운 느낌을 표현하려고 않아 대신 않어를 썼다”는 것이다. 그런 즉 우기는 듯한 ‘않아’는 반어적 표현임이 드러나는 느낌이고, ‘않어’는 그 반어를 말끔히 지운, 무심한 듯한 진짜 부럽지 않은 느낌을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정말 그러한가?

또 한 가지. 다음은 장기하가 작사, 작곡한 <밤양갱>을 두고 한겨레신문 서정민 기자가 쓴 기사다.(『한겨레신문』 2024.03.04.)

 

이 노래의 가장 큰 매력은 노랫말의 어감에 있다. 장기하는 우리말 가사의 말맛과 리듬감을 잘 살리는 거로 정평이 나 있다. 그는 지난해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우리말 고유의 특성을 살리도록 늘 고민하고 연구한다. 그렇게 20년 세월을 살아오면서 나름의 데이터베이스를 갖췄기에 자신감이 있다”고 말했다.

후렴구의 “달디달고 달디달고 달디단 밤양갱”에서 연이은 리을(ㄹ) 받침은 데구루루 구르는 듯한 운율감을 살린다. 또 “밤양갱”의 미음, 이응, 이응(ㅁㅇㅇ) 받침은 실제 양갱의 식감처럼 탄탄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만약 ‘연양갱’이나 ‘팥양갱’이었다면 어감의 맛이 반감됐을 것이다.

 

‘ㄹ받침이 데구루루 구르는 듯한 운율감’, ‘ㅁ,ㅇ.ㅇ 받침이 실제 양갱의 식감처럼 탄탄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짧은 가사에서 쓰인 자음들, ‘ㄴ, ㄹ, ㅁ, ㅇ’은 모두 울림소리인 유성음으로 그 사이에 있는 무성음인 다른 자음들조차 유성음으로 변화시킬 만큼 강력한 울림을 갖는 자음이다. 여기에 ‘달디달고 달디단’에서의 양성모음 ‘아, 오’, 중성모임인 ‘이’의 반복된 배치가 주는 리듬감, 밤양갱의 받침 ‘ㅁ,ㅇ,ㅇ’이 주는 부드러움과 함께 스타카토처럼 찍히는 단정한 마무리는 주목할 만하다. 그것조차 장기하의 ‘데이터베이스’에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않아’와 ‘않어’의 어감상의 차이, ‘ㄴ,ㄹ,ㅁ,ㅇ’ 유성음들의 작용 양상, 모음의 연쇄가 불러일으키는 효과 등이 정말 그러한지는 논의의 초점이 아니다. 논의의 초점은 과연 우리 동시는 장기하의 노래에 맞설 만큼, 아니 그 노래를 능가할 정도로 우리말 자체의 운율을 살리고자 노력하는가 하는 점이다.

동시의 율격에 대한 이 짧은 글을 쓰려고 근래 발표된 수많은 동시들을 짧은 시간 동안 허겁지겁 살펴보았다. 그 결론은 필자의 둔감함 혹은 무지의 소산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 동시는 동시의 본질적인 특성의 하나인 운율에 대해 그다지 개의치 않는다는 사실이다. 리듬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포기해서도 안 되는 동시의 본질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동시는 리듬을, 운율을 그다지 알뜰히 보살피지 않는 채 달려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것이 자금 우리 동시의 안타까운 현실은 아닌지.

 

 

2.

소설의 3요소, 소설 구성의 3요소를 우리는 중, 고등학교를 다니며 배운 적이 있다. 소설의 3요소는 주제, 구성, 문체다. 이를 각각 의미의 층위, 구성적 층위, 서술적 층위 등이라 일컫기도 한다. 의미와 서술만 있으면 될 듯하지만, 소설은 처음⦁중간⦁끝이란 구성적 층위를 필연적으로 요청하기에 구성에도 주요한 방점을 두고 있다. 더욱이 이 구성적 층위의 3요소를 따로 제시하기도 한다. 인물, 사건, 배경이 그것이다. 소설 구성의 핵심인 처음⦁중간⦁끝, 곧 변화의 축이 무엇인가에 따라 소설은 구성되며, 그 변화의 축은 인물, 사건 혹은 배경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물의 변화는 성격의 변화이며, 사건의 변화는 인과로 엮이는 외적 사건의 변화이며, 배경의 변화는 인물과 사건을 둘러싼 상황의 변화를 가리킨다. 소설의 구성은 이 세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를, 혹은 서로 결합하여, 혹은 세 가지 모두를 긴밀하게 엮어나가는 가운데 그 변화하는 양상에 따라 진행된다.

그렇다면 시는? 시는 3요소가 있을까? 주제, 구성, 문체 등은 있을 수 있다. 시에도 주제가 있고, 시에도 표현상의 특징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시의 구성은 소설의 그것에 비해 단조롭기 그지없다. 시의 구성적 요소를 끌어내기는 힘들며, 그저 존재하는 개별 시편들을 통해 기승전결(起承轉結), 병치(竝置)와 대립(對立), 병치와 초점화(焦點化), 선경후정(先景後情), 경험과 상상 등으로 분석해 낼 수 있을 따름이다.

예컨대 다음 동시를 살펴보자.

 

지렁이 총각과 노래기 처녀

 

지렁이 총각

노래기 처녀와 결혼하라 해도

노래기 처녀

발이 많아 너무 많아

신 삼아 주기 힘들다며

싫어 싫어

 

노래기 처녀

지렁이 총각과 결혼하라 해도

지렁이 총각

키가 줄었다 늘었다 하니

옷 지어 주기 힘들다며

싫어 싫어

 

<윤동재, 『어린이문학』 2014년 여름>

 

이 동시의 구성은 엄격한 병치라 할 수 있다. 옛이야기에서 모티브를 가져와 지렁이 총각과 노래기 처녀에게 각자 한 연을 할애하여, 속내를 말하게 한다. 이 뚜렷한 의미의 병치는 운율적 병치로 표현된다. 각 연의 4행, ‘발이 너무 많아’와 ‘키가 줄었다 늘었다 하니’에 변형이 있으며, 의미 또한 여기에 초점화된다. 단정한 동시다.

그렇다고 이와 같은 구성적 특징을 소설의 구성적 특징과 비교하기는 어렵다. 더 나아가 소설 구성의 3요소처럼 시 구성의 3요소를 이끌어내기도 불가능하다. 다만 소설의 근간을 이루는 구성과 마찬가지로 시의 근간을 이루는 여타의 요소들을 추출할 수 있을 따름이다. 

시의 근간을 이루는 여러 요소들.

쉽게 말하면 내용과 형식으로 나눌 수 있을 터이다. 내용은 의미 혹은 주제 등이며, 형식은 다채롭다. 대표적으로는 운율, 이미지, 상징, 비유, 화자, 상상력 등을 나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들 형식적 요소들이 그저 형식인 것만은 아니다. 내용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의미의 형성에 적극 관여하고 작용하기 때문이다. 시의 경우 내용과 형식은 그 어떤 문학 장르보다 결합도, 밀착도가 강하다. 형식이 곧 내용이기 십상이다. 심지어 화자나 상상력은 형식적 장치라기보다 시적 세계를 들여다보는 렌즈와 같아, 그 자체가 내용의 편집, 내용의 초점화를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구분은 짐짓 논의의 편의를 위한 구분일 따름이다.

그런데 이 다채로운 시의 요소들 가운데 시를 시답게 만드는 가장 종요로운 요소는 단연 운율(韻律)이다. 운율은 운과 율로, 운은 동일한 소리, 율은 동일한 박자의 반복을 의미하며, 이 둘은 함께 시의 리듬, 시의 음악성을 규정한다. 운은 자음과 모음 혹은 그 음소들을 동일한 위치에 둠으로써 반복적인 강조와 고유한 리듬을 얻는 방식이다. 반면 율은 셈, 여림 등의 강세와 함께 어휘와 구절의 규칙성, 음수의 규칙성, 음보의 규칙성, 통사의 규칙성 등으로 시 전반의 리듬을 얻는 방식이다. 다만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 리듬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기보다 리듬감이라 말해도 좋을 만큼 느낌으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시 속의 강하고 약한 박자가 어떤 음절에 있는지, 시 속의 음절의 길이가 어디가 얼마나 긴지는 읽는 이에 따라 달라지며, 유연하게 적용해야 하는 적합성의 문제일 뿐 맞고 틀림이 명확한 정확성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예컨대 앞서 언급한 장기하의 <부럽지가 않어>를 다시 살펴보자.

 

너네 자랑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얼마든지 해

난 괜찮어

왜냐면 나는 부럽지가 않어

한 개도 부럽지가 않어

어?

너네 자랑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얼마든지 해

난 괜찮어

왜냐면 나는 부럽지가 않어

전혀 부럽지가 않어

 

노랫말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부분이다. 물론 노랫말은 시와 달리 응축되어 있지 않다. 느슨하고, 의미의 잉여가 많다. 그럼에도 이 노랫말에는 노랫말 자체만으로도 운율이 느껴진다. 그렇지만 이 노랫말에서 반복적 요소가 무엇인지를 보는 관점은 다채로울 수 있다. 예컨대 거의 모든 행마다 말미에 등장하는 ‘어’를 리듬이 실현된 것으로 볼 수도 있고, ‘않어’, ‘괜찮어’의 ‘않어’를 그렇게 볼 수도 있고, 제목처럼 ‘부럽지가 않어’ 전체를 리듬이 실현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어떻게 보는가는 많은 부분 작가가 의도하는 부분과 독자가 감지하는 부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리듬은 리듬감을 잘 살리고 있다는 표현에서처럼 느낌과 효과로 인식함이 타당하다.

 

3.

문학이론가이자 문화비평가였던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문화의 단층을 분석하면서 세 가지 층위가 존재함을 피력한 바 있다. 낡은 시대의 잔존물, 한 시대의 주도적인 문화, 새로운 시대를 예감하는 대안적인 문화가 그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한 시대를 살펴볼 때 아주 유효하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동시의 출발을 알리는 근대 동시 역시 이 세 가지 층위가 혼재된 채 시작되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가 그러했다. 전통적으로 존재했던 민요 가운데 어린이가 즐길 수 있도록 변용된 전래동요와 시대 전체를 관통했던 동요, 새롭게 대두되기 시작한 동시가 그 세 가지 단층이다.

우리 동시의 첫 번째 시대는 단연코 동요가 주도적인 문화 양식으로 존재했다. 애초 출발 자체가 노래였던 것이다. 주로 민요의 리듬인 3(4).4조와 창가에 기댄 7.5조의 운율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동요는 다시 유아를 대상으로 하는 놀이 동요와 성장한 어린이를 독자로 하는 서정 동요가 주도적이었으며, 특히 서정 동요들의 작품 속 정서 또한 전래동요가 지녔던 자연물과의 유추를 통한 그리움과 상실감을 주로 노래했다. 정지용, 윤복진 등 새로운 동시로서의 면모를 시도한 작가들이 없지 않았지만 식민지 시대 전 기간에 걸쳐 동요는 아동문학의 시 장르로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물론 4.4조와 7.5조에 지나치게 얽매인 형식적 단조로움, 감상적이거나 유아적인 정서적 고착을 떨치기 어려웠음도 사실이다.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 동요에 대한 반발을 기치로 삼은 ‘자유시 운동’은 이미지를 중시함으로써 동시에 내재된 음악적 자질을 의식적으로 폄하하였으며, 종국에는 어린이로부터도 멀어져 갔다. 동시의 문학성을 강조하다 동시의 본질적인 자질인 운율마저 내팽개쳐 버린 것이다. 이에 맞서 1970년대 동심의 본성을 되찾자는 이오덕의 현실주의적인 동시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어린이의 현실적인 삶을 동시가 담아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정작 그 시들은 어린이들에게서 멀어져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 동시의 이 두 가지 정향은 아주 오랫동안 서로 융합되지 못한 채 대척을 이루며 존재해 왔다. 그러나 대립적인 이 두 가지 관점, 동심천사주의와 동심본성주의는 강조점만 다를 뿐 어린이를 어른의 관념을 투영하는 대상화된 존재로 본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었다. 나아가 동시에 내재된 음악적 자질을 홀대하였다는 점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이 견고한 대립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어린이를 보는 관점, 문학을 보는 관점, 동시를 보는 관점 자체를 무너뜨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주체로서의 어린이, 경험으로서의 문학, 시의 본질적인 특성으로서의 운율 등이 새로운 동시의 형성을 위한 발판으로 마련되어야만 했다. 그 결과 이른 바 아동문학의 황금시대라 일컬을 수 있는 200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다음 동시를 만난다.

 

귀뚜라미

 

라미 라미

맨드라미

 

라미 라미

쓰르라미

 

맨드라미 지고

귀뚜라미 우네

 

가을이라고

가을이 왔다고 우네

 

라미라미 

동그라미

 

동그란 

보름달

<최승호, 『말놀이 동시집 1』, 2005>

 

이 동시는 ‘가나라라’의 ‘라’ 항목에 설정된 작품이다. 어두음으로는 찾기 힘든 음절이기에 일종의 접사가 굳어진 ‘라미’를 운율의 중심항으로 설정하였다. 맨드라미, 쓰르라미, 귀뚜라미, 동그라미가 2음보의 리듬 속에서 운율을 형성하며 작고 맞춤한 한 세상을 열어 보이고 있다. 말놀이란 기본적인 발상은 동시의 즐거움, 우리말 조어의 아름다움에 눈 뜨게 한다. 계몽의 굴레에서 벗어나 있으며, 동심주의의 관념으로부터도 훌쩍 넘어서 있다. 어쩌면 그동안 이미지의 과잉, 의미의 과잉에 우리 동시는 고착되어 있었으며, 최승호의 말놀이 동시는 이미지와 의미를 한껏 줄이고 리듬을 한층 강화한 말놀이로 기존의 동시를 일신한 것이었다.

최승호의 동시가 지닌 힘을 목도한 이래 이처럼 동시의 리듬감을 실현해 보고자 하는 시도가 뒤따랐다. 정유경의 동시, <_랑>이 대표적이다.

 

낭랑한 네 목소리가 좋아

명랑한 네 모습이 좋아

너랑 매일 짝하고 싶어

너랑 매일 놀고 싶어

살랑살랑살랑 봄바람처럼

촐랑촐랑촐랑 설레는 내 마음

자랑하고 싶어, 나는

사랑에 빠졌어

<정유경, _랑, 『까만 밤』, 창비>

 

당연 이 시의 운율은 ‘_랑’으로부터 나온다. 그런데 행의 마지막 음절이 아니고, 그렇다고 첫음절도 아닌 두 번째 음절이다. 어두음이나 접사 혹은 용언을 뛰어넘어, 그 어디에 있는 어떤 음절이든 운율의 장치로 활용되기에 이르른 것이다. 더욱이 ‘너랑’에서 쓰는 보조사 ‘랑’에는 이미 강세가 내재되어 있다. 다른 어휘들에도 강세는 전체적으로 첫 음절에 있지만 두 번째 음절인 ‘랑’에도 역시 여리지만 강세가 뚜렷하다. 따라서 동시 전반에 걸친 리드미컬한 율조를 이 작품은 획득하고 있는 셈이다. 음절의 반복뿐만 아니라 동시 전체가 통사적 반복을 통한 리듬감도 생생하게 활용하고 있다. 그리고 두 행이 하나의 짝을 이룬 채 기승전결의 짜임을 이루고 있어 동시의 형식적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도 이 작품은 잘 보여준다. 아이의 설레는 마음 역시 잘 나타나 있다. 다만 운율의 통일성을 위해 통사의 자연스러운 흐름조차 분절시키는 마지막 두 행의 짜임에 변화를 주었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지만 시인의 선택도 자연스럽다. ‘자랑하고 싶어, 나는’의 ‘나는’에서 상대적으로 긴 휴지와 긴장이 짐짓 환기되기 때문이다.

‘_랑’과 달리 임복순의 동시는 어휘를 반복적으로 제시한다. ‘내가 그린 기린 그림’으로 유명한 기린은 그 긴 목으로 말미암아 거듭 우리 동시에 소환되는(김륭의 「길에서 기린을 만난다면」, 송진권의 「기린이 있으니까」 등이 있다) 동물이다.

 

나만 보았지

 

딱 보는 순간,

기린 꼬리 덥석 물었다가

기린 머리 살살 쓰다듬다가

기린 콧등 앙, 깨물었다가

기린 눈 가리고 까꿍 하다가

기린 입 쫙 벌리고 닫았다가

기린 뺨에 얼굴 비비다가

기린 뒷다리 들고 공중그네 태우다가

기린 마주보고 윙크하다가

기린 통째로 들고 때려눕혔다가

기린 안고 어르다가

기린 째려보며 뭐라 하다가

기린 눈앞에서 메롱하다가

기린 엎어놓고 맴매하다가

기린 등 토닥토닥 두드려주다가

다시 수학 문제 푼다.

 

종혁이 기린 필통,

얼굴 흙빛 되어 철퍼덕!

뻗었다. 책상 위에서.

<임복순, 『동시마중』 2014년 1/2월호>

 

이 동시에서 기린은 수난 받는 존재다. 동시를 읽으며, 이런 놈이 있나 은근 부아가 치밀기도 했으니. 그런데 연을 바꿔 등장한 그 기린의 실체는 실제의 기린이 아니라 필통이었기에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수난을 이기지 못한 종국에 기린은 책상 위에서 뻗어버리고 만다.

이 시의 리듬감은 당연 첫 행마다 굳이 시시콜콜 등장하는 ‘기린’에 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며(하고) ~다가’로 드러나는 행의 통사적 반복 역시 두드러진다. 더욱이 의성어와 의태어 역시 효과적인 리듬감을 풍부하게 살려낸다. 말놀이 동시에 한껏 장식을 매달고 등장한 작품이다. 그럼에도 그 장식 어느 하나 군더더기가 없다. 잘 빚어진 항아리가 또 하나 세상에 몸을 내민 것이다.

이들 동시들의 리듬은 음위율이다. 동일한 음절 혹은 어절이 동일한 위치에 거듭 반복됨으로써 빚어지는 운율감이다. 음위율은 음절 혹은 어절의 특성으로 말미암아 주로 행을 단위로 리듬감이 표현된다. 음수율과 음보율의 경우도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음수율이나 음보율로 포획되기는 어렵지만 통사의 반복 역시 우리말의 가장 중요한 운율적 장치로 존재하며, 이는 행을 단위로 실현되기도 하지만 연 전체에 걸쳐 존재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운율의 운은 음소인 음운 단위에서 실현되는 리듬감이다. 자모음 자체가 반복되는 리듬감으로, 우리 시에서는 찾기 힘들다. 하여 우리 시의 운율을 율격으로 따로 명명해야 한다는 시도 또한 없지 않지만, 덜컥 다음과 같은 시를 만나기도 하니 가능성을 미리 차단할 것까지는 없을 듯도 싶다.

 

아직은 바깥이 있다

 

논에 물 넣는 모내기 철이

눈에 봄을 가득 채운다

 

흙바닥에 깔린 크다란 물거울 끝에

늙은 농부님, 발 담그고 서 있는데

붉은 저녁빛이 射線(사선)으로 들어가는 마을,

묽은 논물에 立體(입체)로 내려와 있다

 

<황지우, 「아직은 바깥이 있다」 부분,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문학과지성, 1998>

 

황지우는 모더니즘적인 기법으로 리얼리즘적인 세상을 표현하는 것에 능숙하다. 이 시 또한 전통적인 서정을 모더니즘적인 형식으로 피력한 작품이다. 인용된 이 시의 앞 두 연에 반복적으로 나타나 운율적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음운들을 찾아보자. 그리고 그 효과가 무엇인지 자유롭게, 내키는 대로, 마음껏 밝혀 보자.

이 시에 나타나는 운율적 장치는.........

이 장치의 효과는 .........

 

4.

 

지금 내 앞에는 두 권의 <동시마중>이 얌전히 놓여 있다. 작은 책이지만 좋은 동시가 잔뜩 담긴, 풍성한 책이다. 더욱이 이 두 권은 모두 11/12월호다. 그러니 『동시마중』 동시선집 호들이다. 그러니 더욱 풍성할 수밖에. 잘 차려진 밥상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다. 올 한 해의 우리 동시가 일구어낸 귀한 곡식과 열매들, 채소들이 오롯이 담긴 밥상이다.

이 두 권의 『동시마중』, 2023년과 2024년의 동시선집을 앞에 둔 것은 우리 동시의 현재들이 운율을, 더 정확히는 율격을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가를 엿보기 위함이다. 결론은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 동시는 리듬을, 운율을 그다지 알뜰히 보살피지 않는 채 달려가고 있다는 현실이다.

2023년 동시선집의 경우, 김용성의 「굽은다리역」이 산문시의 형식이기는 하지만 아주 느슨한 통사적 반복으로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 김철순의 「거미의 집」에서는 2음보의 짧은 리듬감 속에 통사적 반복과 변화를 동반한 음운의 반복도 눈에 띄었다. 김현서의 「드디어 때가 됐어」에서도 ‘밤’이란 어휘가 ‘~는’이란 수식어와 함께 반복적인 리듬감을 부여하며 행마다 마무리된다. 박해정의 「오디나무 아래서」도 짧지만 효과적으로 리듬감을 살리고 있다.

 

오디는 혓바닥을 새까맣게 하고

열 손가락을 새까맣게 하고

집으로 가는 길도

새까맣게 하더니

 

또글또글

여름 숲으로 굴러갔습니다.

<박해정, 「오디나무 아래서」, 『동시마중』 2023년 11/12월호>

 

‘혓바닥, 열 손가락, 집으로 가는 길, 여름 숲’으로 점점 확장되는 모습도 인상적인 작품이다. 다만 마지막 연, 어디쯤엔가 여름 숲조차 ‘새까맣게’를 덧붙였으면 리듬의 통일성이 작품 전체를 감싸며 훨씬 더 잘 살아나지 않았을까 아쉽기도 하다. 당연히 사족이지만, 예컨대 ‘또글또글/ 새까맣게 어두워진/ 여름 숲으로 굴러갔습니다’는 식으로. 

박혜선의 <라면>에도 ‘라면’이란 가정 혹은 조건의 어미가 반복된다. 신솔원의 <씨감자>에서도 구수한 사투리를 구사함으로써 어조가 통일적으로 구성되며, 이는 자연스럽게 억양을 빚어내며, 반복적인 리듬감을 형성해 낸다. 유강희의 「내가 도니까」 역시 ‘돈다’가 여러 형태의 어미로 변주되며 반복적인 리듬감을 강화, 확장해 나가고 있다. 정연철의 「초성 동시 ㅂㅂ」은 ㅂ음을 통해 의미를 연결한 작품이다. 그러나 개별적인 단어의 의미가 두드러진 나머지 어휘 자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리듬감을 형성하는 데에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애초 어휘의 발견을 통한 의미의 형성에 초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최승호의 「칠성장어가 칠성무당벌레에게」는 느슨한 듯하지만 ‘북두칠성’을 매개로 통사를 거듭 반복함으로써 말놀이 동시를 한층 더 유려하게 만들어낸 느낌을 받게 하는 동시다. 의미와 운율의 상호 짜임에서 의미를 조금 더 풍부하게 만들고, 운율을 조금 약화시키면 이렇게 되는 것이다.

 

나는 가끔

내가 북두칠성에서 왔다는 생각이 들어

그리고 언젠가는 내가 다시

북두칠성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고는 하지

 

칠성무당벌레야

너도 그런 생각 들지 않니

<최승호, 「칠성장어가 칠성무당벌레에게」, 『동시마중』 2023년 11/12월호>

 

이 동시에서 제목으로만 등장하는 ‘칠성장어’ 역시 의미의 중심축으로 단단하게 자리 잡아, 작품을 한결 입체적으로 만들고 있으며, 이름의 유사성으로 존재의 유사성을 유추해 낸다. 이는 자연스럽게 ‘칠성’이란 어휘의 반복, ‘생각이 들어’에서 드러나는 통사의 반복도 운율 효과를 자아낸다. 

이와 마찬가지로 말놀이를 주축으로 한 한상순의 「공」에서도 ‘볼’이란 얼굴의 한 부분을 일컫는 말이 효과적으로 배치되어 운율을 형성한다.

여기까지가 2023년의 동시선집에 수록된 작품들의 운율 양상이다. 94편의 동시 중 10편 남짓. 물론 필자의 둔한 눈이 명확한 율격을 실현해 보이는 작품조차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여기에서 걸러낸 10편의 동시들보다 더 있다 하더라도, 결코 운율이 우리 동시의 한 축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것은 명확하다. 더욱이 손에 꼽은 작품들조차 의식적이고 자각적이라기보다 의미의 형성을 위해 자연스럽게 리듬감을 획득한 작품들도 적지 않다는 점에서 우리 동시가 음악성을 홀대하고 있다는 결론은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2024년의 동시선집은 어떨까? 추측컨대 그다지 다르지는 않을 듯하다. 

먼저 눈에 띈 동시는 김성은의 「기내식」이다. ‘밥’이란 어휘를 시행의 첫머리에 두고, 수식어인 ‘어떠한’을 분절시킴으로써 궁금증을 자아낸다. 운율뿐만 아니라, 아이의 내면 심리도 잘 드러나는 참신한 동시다. 문신의 「짜장면과 달」에도 구어체가 갖는 리듬감을 지니고 있다. 질문과 자답이 뒤섞여 비슷한 음률이 사투리에 묻어난다. 얼마 전 작고하신 안학수 시인의 「벌레 먹인 잎에게」에도 운율은 있다. 생전의 그이처럼 드러내지 않고 뒷전으로 물러나 있으나 반짝인다.

 

벌레 먹인 잎에게

 

너의 나무가 피우고 맺은

꽃만 어여쁜 게 아니란다.

열매만 장한 게 아니란다.

 

너도 그만큼

어여쁘고 장하단다.

 

네가 먹여 준 애벌레 하나

너를 닮은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라.

<안학수, 『동시마중』 2024년 7/8월호>

 

잎의 나무가 피우고 맺은 꽃과 열매, 잎이 키운 애벌레가 어여쁘고 장하듯 잎 또한 그러할 수밖에 없음을 피력하고 있다. 그 가운데 통사적 구성이 조응하며 리듬감을 자아낸다.

이상교의 「깨」 역시 동일한 음절을 시행의 앞에 배치함으로써 쉼 없이 강세를 부여한다. 말놀이 동시를 떠올리게 한다. 임미성의 「어디쯤 가고 있을까」에도 운율은 살아 있다. 질문과 대답이 모두 단답식인 나머지 리듬감이 형성된다. 마지막 연의 반복도 주제와 조응하며, 조금씩 망설이지만 지금까지와는 다른 쪽을 향해 힘겹게 나아가는 아이의 모습이 잘 보인다. 다만 서술의 초점이 아이인지 시인인지 엄마인지 모호하거나 중첩되어 동시의 단단함을 그르친다. 정유경의 「할머니가 할머니의 엄마 이야기를 들려 주시면」에서도 율격은 감지된다. 거듭 반복되는 ‘이야기며’라는 나열 때문이다. 산문적인 흐름에 몸을 기대고 있지만, 마침표인 듯 이어지는 ‘이야기며’가 리듬감을 형성한다. 간접 인용하는 ‘~라는’이란 어미 역시 제몫의 역할을 다 하고 있다. 포도의 「꿀빵과 엄마」에도 단조롭지만 리듬감이 있다. 홍일표의 「양파」와 홍재현의 「나팔꽃의 자백」에도 리듬감이 묻어난다. 구성적으로 유추되는 의미나 대비를 이루는 의미가 서로 짝을 이루고 있기에 어조를 잘 조율하면 리듬감이 쉽게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펴보니 2024년의 『동시마중』 동시선집에 실린 작품들 가운데 운율이 감지되는 작품은 9편이다. 104편의 작품 가운데 9편이고, 1/10에도 미치지 못하는 정도의 작품에서 운율을 찾을 수 있다니 결코 많은 숫자라 할 수가 없다. 더욱이 운율감이 느껴진다고는 하지만 의식적이고 명료하게 운율감 자체를 형식적 장치로 전면에 내세운 것들이라기보다 의미의 반복과 누적으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생겨난 통사적인 운율감이 주도적임을 엿볼 수 있었다. 이 분석의 결과 역시 우리 동시는 동시의 음악적 자질에 무심함을 입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5.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문장이 실제 놀이 속에서는 어떻게 구현될까? 한번 불러 보자.

‘화’에서 높이, ‘꽃’과 ‘이’에 같은 강세가, ‘이’는 조금 더 길고 낮게,  ‘피었’에서 한 박자 짧게 쉬고 ‘습니다’로 마무리된다. 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음률과 셈여림은 문장에 활력을 부여한다. 노래하듯 외치는 문장은 그저 평이하게 읊조리는 문장과는 확연히 다르다.

시가 산문과 다른 점은 그 무엇보다 리듬에 기인하는 바 크다. 대지의 은폐라고 지칭되는 의미의 모호성에 덧붙여 시의 형식은 음악적 자질로 인해 한층 활성화된다. 동시를 시의 시원에 견주는 것은 동시의 음악성 때문이다. 그러니 동시가 시의 최대치가 되기 위해서는 시가 지닌 음악적 자질의 최대치를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 동시는 애초에 노래였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어린이를 독자로 상정하고 창작된 시를 동시라고 한다면 의당 동시는 어린이의 본질적 특성을 부여잡고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많고 많은 특성들 가운데 하나가 혹시 놀이는 아닐까? 어린이들에게 놀이는 어쩌면 먹고 자고 싸는 것 말고는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 놀이 속에서 아이들은 배우고 성장하고 깨우친다. 놀이야말로 아이들의 본질이 아닐까? 만약 놀이라면, 동시 또한 말놀이라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놀이이자 말놀이라면, 의당 이 소박한 말에도 의당 리듬이 있을 것이다.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있다. 모든 놀이는 놀이의 전체가, 또 놀이의 부분 부분이 리듬을 지니기 때문이다.

혹자는 우리 동시에는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우리 동시에 환상성도 필요할지도 모르고. 우리 동시에 가감 없는 아동의 현실도 더 많이 담아내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우리 동시에 유머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다 필요하다. 있으면 없느니보다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운율이야말로 가장 화급하게 요청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최승호의 말놀이 동시집이 우리 동시사의 한 획을 그었음에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 어떤 획을 그었는가는 물론 논자들마다 분분할 것이다. 필자는 그 동시집이 앞서 언급하였듯이 의미를 줄이고, 그만큼 리듬을 강화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60년대, 70년대를 지나며 잃어버렸던 음률을 되찾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저층에 새로운 아동의 발견, 새로운 문학의 발견, 새로운 동시의 발견이 거대하게 잠복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 발견들이 동시의 율격을 다시금 소환해 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기껏 다시 찾은 동시의 음악적 자질을 또 다시 우리 모두는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운율과 함께 전진하지 못하는 동시의 발전이란 고작해야 바위를 지고 오르다 다시 떨어지고, 다시 떨어지는 시시포스의 끝없는 노고처럼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왈칵 든다. 지금은 다시금 동시의 본질을 생각할 때인 것이다.